원빈 스님의 청춘 고민 상담소
남들이 다 원하는 직장을 다녔습니다. 11년을 꾸준히…. 공부도 열심히 했고 학위와 표창장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인정받을수록 공허해졌습니다. 공허의 끝은 날카롭더라고요.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고. 작년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제주로 와 처음부터 내 것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고 1년 동안 많은 것을 또 이뤘습니다. 그런데 공허함이 아닌 나태함에 빠져버렸습니다. 일을 자꾸 미루고 닥쳐야 합니다. 지친 걸까요? 오만한 걸까요? 행복을 찾아내려 와서 왜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할까요. 마음이 안개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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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우님, 걱정은 그만하시고 이제 안개를 뚫고 나아가세요. 11년간이라고 표현하셨지만 그런 직장을 다니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부지런히 노력한 시간을 따져본다면 아마 더욱 긴 시간일 겁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훌륭하십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삶을 살아내셨을 법우님의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그런데 조금의 문제가 발생한 것 같군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낸 과거의 삶이 강력한 습관으로 현재에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죠. 열심히 살았던 만큼 그 습관은 아주 강력할 테니까요.
대기업의 일상은 치열할 테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요. 끝없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 정신의 고무줄을 한계 상황까지 잡아당기며 살아왔겠지요. 법우님은 어느 날 그 고무줄이 그냥 끊어져버린 걸 테고요. 그 결과물을 ‘공허함’이라고 표현하시는 것 같군요. 그래서 삶의 방식을 바꿨고, 아마 그 삶은 ‘이렇게 살면 좋지 않을까?’라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게 제주에서 1년을 보내신 것 같고요.
그런데 제주에서의 삶과 직장에서의 삶은 분명히 다릅니다. 물론 달라야 하고요. 이 포인트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혹시 제주에서도 직장에서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 아닌가요? 기준이 달라졌고, 삶이 법우님에게 요구하는 자세도 달라졌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간섭하면 지금 이 순간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과거의 나를 놓아버리셔야 돼요. 그리고 현재의 나를 분석해봐야 합니다.
어떻게 하냐고요? 일단 과거 직장에서의 일상을 떠올려보세요. 혹시 상상도 하기 싫은가요? 그럼 여전히 직장에서의 삶이 상처로 남아 있는 거예요.
그렇진 않은가요? 그럼 그 일상을 자세하게 적어보세요. 그리고 그 속에서 직장이 법우님에게 요구했던 자질들을 몇 가지만 뽑아보세요. 예를 들면 부지런함, 경쟁 등이겠죠? 또 그 요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기에 생긴 습관들을 분석해보세요. 부지런하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 어떻게 되었는지, 경쟁하다보니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적어보는 거예요.
혹시 너무 어렵나요? 그럼 그냥 일상을 자세하게 적어보기만 하셔도 좋아요. 다 적어보고 생각해보셨다면 이번에는 현재의 삶을 살펴보는 거예요. 지금 현재의 삶이 나에게 요구하는 자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거죠. 예를 들면 제주에서의 삶이 직장에서처럼 부지런할 필요가 있나요? 또 경쟁을 통해 성과를 내야 하나요? 성과를 못 내면 자신을 책망하면서까지 닦달할 필요가 있나요?
끊어질 만큼 팽팽해진 긴장감과 경쟁 등의 삶이 공허하셨을 텐데, 혹시 지금의 삶을 제주의 삶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 아닌지를 꼭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100% 그 기준이 아니더라도 제주의 삶은 완전히 다른 기준이어야 할 테니까요. 직장에서 치열함의 습관이 지금 이 순간을 침범하고 있는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명확한 기준으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해서 삶을 나아갈 때 우리는 불확실성의 안개를 뚫고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법우님은 충분히 노력했습니다.
그 과거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이제 그만 과거에서 벗어나세요.
그래야 지금 이 순간의 제주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최근 올랐던 한라산 1700고지의 풍경이 생각나네요. 구름 위에 펼쳐진 천상의 정원. 그 아름다운 제주를 즐기세요. 다시 제주에 갔을 때 우리 웃으면서 만날 수 있는 인연이 있기를 상상해봅니다.
부디 과거에서 벗어나소서.
글 : 칼럼니스트 원빈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