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빈 스님의 청춘 고민 상담소
얼마 전 반려견을 떠나 보내고 펫로스 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해왔기 때문에 저는 물론이고 부모님도 무척 슬퍼하고 계십니다. 형제가 없었던 저에게 반려견은 막내 동생 같은 존재였어요. 부모님에게는 저보다 더 애교 많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였고요. 정말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를 잃고 나니 너무 힘이 듭니다.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니 유기견 봉사활동을 하거나 새로운 반려견을 통해 극복해나갔다고 하던데 저는 아직 그럴 준비는 안 돼 있는 것 같아요. 또 이런 상황이 올까 두려운 마음이 커요. 주변에서 개 한 마리 때문에 유난이라고 할까봐 어디다 터놓고 말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빨리 시간이 지나 무던해지길 기다리는 게 답일까요?
-dish***
전 형제 하나 없는 독자입니다. 그런 아들이 어느 날 출가한다고 하니 부모님은 속이 꽤나 상하셨겠죠? 아마 큰 상실감에 시달리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스님이 되고 나서 몇 년 만에 속가에 간 적이 있습니다. 가면서 외로워하실 부모님을 위해서 무엇을 선물하면 좋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시면 어떨까?’
부모님은 싫다고 하셨습니다.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겠죠. 저는 그래도 한 번 키워보시라고 강하게 권했고, 부모님들은 마지못해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동물들 중 자체적인 생산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생존을 유지하는 동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강아지는 오직 주인에 대한 사랑만으로 생존을 유지하죠. 그렇기에 강아지의 주인을 사랑하는 능력은 전문가 수준입니다. 주인과 눈을 마주치면 납작 엎드려서 포복자세로 기어옵니다. 꼬리를 광속으로 흔들며 반가움을 표하죠. 주인이 ‘뒤집어!’라고 한 마디 하면 자신의 배를 뒤집어 까 보이면서까지 완전한 복종의 표시를 보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해주는 강아지를 주인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부모님의 상처 받았던 마음은
강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사고가 생겼어요. 부모님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온 후 외출을 하셨는데 몇 시간 뒤 돌아간 집에는 죽은 강아지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산책 중에 쥐약을 먹었던 모양입니다. 아들스님 앞에서 항상 괜찮은 척, 강한 척 하시던 부친이 그날부터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생전 볼 수 없던 부친의 눈물에 당황했습니다. 당황한 것은 부친 역시 마찬가지였죠. 강아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거대한 상실감 때문에 아들스님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니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깊은 상실감을 위로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냥 상실감을 덮어두는 것으로는 상처가 곪아갈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저는 부모님에게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드렸습니다. 눈물은 어느 정도 슬픔의 고름을 씻어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눈물을 흘리셨다고 판단했을 때 부모님에게 강아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렸습니다. 하시고 말고는 부모님의 자유였죠. 부모님은 강아지가 좋은 곳에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사이사이 저는 부모님에게 죽음에 대한 부처님의 지혜를 알려드렸죠. 그렇게 한 동안의 추모와 기도의 시간이 지나자 부모님의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강아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충분히 했구나!’
저는 오랜만에 만나 강아지 이야기를 하는 부모님의 표정과 말투를 보고 이제 충분하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다시 권했죠.
“강아지를 한 마리 새로 키우시면 어때요?”
부모님은 전에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미안함, 다시 생길 수 있는 상실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강아지를 키우시기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그 거부는 그리 강렬하지 않다는 것을 저는 느꼈죠. 하지만 억지로 밀어붙일 수는 없는 일이기에 일단 인연을 기다렸습니다.
정말 인연인 것일까요? 어떤 페이스북 친구가 먼 지방에서 저를 만나겠다고 찾아오면서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이라고 데리고 왔습니다. 하지만 절에서는 그 강아지를 키울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그 강아지를 데리고 부모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날부터 강아지는 부모님 품 안에 안겨서 소중하게 자라났죠.
강아지 이름은 해피라고 지었습니다. 그 전에 있던 강아지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사랑이 넘치는 강아지입니다. 그래서 가끔 부모님의 집에 들르는 일이 있으면 “해피야~ 해피!”하고 들려오는 행복의 소리가 제 귀를 즐겁게 합니다.
이 행복의 소리가 들릴 수 있었던 것은 상실감을 덮어두고 썩어버리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상실감에 슬퍼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지만 필요하다면 눈물을 흘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강아지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도를 적극적으로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을 베풀 때 가장 먼저 치유 받는 건 바로 자신입니다.
이 기도가 죽은 강아지에게 닿는다면 그 강아지에게도 도움이 물론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자신이 그 기도로 인해 치유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을 베풀 때 가장 먼저 치유 받는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강아지를 선택하는 것은 그 이후에도 늦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존재와 죽음으로 헤어진 경우의 상실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직면해서 적극적으로 슬퍼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여 상실감의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는 과정을 필수로 거쳐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처는 흉터로 변해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힐 수 있으니까요.
많이 우시고, 기도하시고, 힘내셔서 행복해시길 기원합니다.
글 : 칼럼니스트 원빈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