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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Aug 01. 2016

열한 살 소년이 '월리를 찾아라'를 그린다면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 순수하고 기발한 아이의 마음이 담긴 따뜻한 메시지, 아이 그림을 명화처럼 감상하며 ‘아이 그림 읽어주는 여자’ 권정은의 해설을 들어봅니다. 아이 그림을 통해 아이와 내 자신, 그리고 세상과 다시 나누는 이야기. 이 연재는 권정은 ‘Art Centre 아이’ 원장의 책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내용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 편집자 말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의 그림은 ‘보는 그림’이라기보다는 ‘읽는 그림’이다. 그의 대부분의 그림이 그렇지만 특히 ‘아이들의 놀이’를 보고 있노라면 16세기 당시 유럽의 어느 하루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내 눈으로 그 현장을 생생히 보고 있는 듯하다.

색채와 구성에 먼저 감동되는 대부분의 그림과는 달리 이 그림은 눈앞에서 하나하나 내용을 찾아보고 읽어보는 즐거움이 더 크다.

‘아이들의 놀이’(Children’s Games, 1560) 피테르 브뢰헬 작품


이렇게 이 그림은 당시의 생활상을 백과사전처럼 자세히 알려주고 기록해준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들에 대한 화가의 세심한 관찰과 하나하나 기록하듯 그려내는 성실한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처음 그림을 볼 때는 아이들의 놀이를 관찰하는 즐거움과 시대와 상관없이 똑같은 인간사에 신기해하며 탄복하는 마음이 크지만, 다 보고 나면 이 세세한 묘사를 일궈낸 화가의 정성과 노력에 더 탄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정성은 사람과 삶에 대한 그린 이의 애정 없이는 어려운 일임을 실감하게 된다. 애정이 있기에 스쳐 지나치는 사람들의 작은 행동도 사랑을 담아 바라보고 관찰하게 되며 그것을 기억하면서 그려냈을 테니 말이다.

올해 열한 살이 된 강우의 그림에서도 브뢰헬의 그림에서 보이는 그 애정과 열정이 느껴진다. 강우는 여덟 살 때 처음으로 나에게 그림을 배우러 왔다. 도무지 어린아이의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림에 대한 묘사력이 무척 뛰어났다. 그런데 강우가 여덟 살일 때나 아홉 살, 열 살, 그리고 열한 살이 된 지금에도 느껴지는 것은 강우의 뛰어난 묘사력은 평상시 사물이나 사람을 대수롭게 스쳐 지나가지 않는 이 아이의 꼼꼼한 관찰력에 바탕을 둔다는 점이다.

담을 넘어가는 도둑을 그릴 때도 도둑이 입고 있는 셔츠 뒷목에 붙은 상표가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디테일까지 표현하고, 엎드려 절하는 사람의 발바닥 뒤꿈치의 굴곡까지도 섬세하게 묘사했다. 또 식사를 준비하는 그림에서는 음식을 만드는 엄마 옆에서 맛있는 전을 주워 먹으려고 아이가 까치발 올리고 손을 뻗치는 모습을 묘사했다. 세상에 대한 이 아이의 관찰은 예사롭지 않다.

‘공항의 많은 사람들’ 백강우 작품


그런 강우가 어느 날 공항을 그렸다. 그림 속 공항 창밖으로는 커다란 여객기 한 대가 대기하고 있는데 큰 여객기와 대비되는 작은 사람들이 벌레처럼 바글거리며 분주히 돌아다닌다. 비행기가 연착되었는지 지쳐서 의자에 길게 누워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고 깃발 든 리더 앞에 모인 단체 여행객도 보인다. 요즘 들어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고 있는 강우답게 그림 한가운데에는 블루 스크린 앞에서 영화 촬영하는 배우들, 그들에게 열광하며 구경하는 구경꾼들까지 그려 넣었다. 왼편 뒤쪽으로는 커다란 마약탐지견이 경찰과 함께 가방 냄새들을 맡고 있다.


어떤 사람이 돈다발을 뿌렸는지 연두색 돈들이 날아다니고 있는 장면도 있다. 그리고 자기 몸보다 더 큰 여행 짐을 혼자 힘겹게 끌고 가는 사람을 비롯해 분주히 자기 갈 길을 가는 여행객들이 공항 안을 꽉 채우고 있다.

공항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기억만으로 이런 풍경들을 쓱싹 그려낸다는 것은 미술에 대한 소질을 떠나 그린 이가 얼마나 관찰력이 높은지 잘 보여준다. 관찰은 흥미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모든 풍경에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 많은 사람들의 상황을 하나하나 풀어내며 그려내고 있는 것은 열정이 있기에 가능하다. 나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집중하며 그 많은 사람들을 그려내는 강우를 보면서 그의 집중력과 열정에 감동했다.

그리고 다 그린 강우의 그림을 받아 들며 마치 브뢰헬의 그림을 볼 때처럼, 그리고 <월리를 찾아라>에서 월리를 찾아볼 때처럼 사람들을 하나하나 보고 그 안에 담긴 각자의 이야기들을 읽어내기 시작한다.

어린이들도 그림 하나를 그리는데 이만큼의 열정을 쏟고 집중을 하며 행복해하고 정서적인 안정을 갖는데, 더 성숙한 어른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휩쓸리는 마른 풀처럼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살 수는 없다.

먼저 내 가슴 속에서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들어보자. 나와 세상에 대한 애정을 갖는다면 내 안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가 무엇인지 듣게 될 것이다.


글 : 칼럼니스트 권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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