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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Aug 09. 2016

'누운 배'에 갇힌 당신, 탈출할 수 있을까

서평 <누운 배>

                                

배가 기울었다


한밤중 팀장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도착한 주인공의 눈앞에는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는 안 될 광경이 펼쳐진다. 선체의 총 길이 200미터, 높이 34미터, 폭 32미터. 진수식을 마친 "거대하고 흰 절벽" 같은 배 2002호가 반쯤 기울어져 있다. 의장부두에는 선체가 완전히 쓰러지지 않도록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몇몇 넋이 나간 사람들의 고요, 일찌감치 포기하고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배가 쓰러지니 어서 회사로 들어오라는 팀장의 전화를 받았다"라고 시작되는 이 인상적인 시퀀스는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누운 배>(이혁진/ 한겨레출판/ 2016년)의 첫 장면이다. 현장에 도착한 주인공의 주위로 상황 수습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주인공은 사람들과 함께 상황 파악에 열을 올리지만 실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팀장은 주머니에서 꺼낸 종이 뭉치를 건네며 말한다. "임원들 주소랑 연락천데, 나가서 아직 집에 있는 임원 있으면 회사로 들여보내라."(13쪽) 그러나 찾아간 그 어느 곳에도 임원들은 없었다. 임원들의 행방을 고민하던 주인공은 잠시 후 배가 완전히 쓰러졌다는 소식을 받는다.

누운 배의 거대하고 추악한 밑바닥을 들춰내다

소설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주인공이 속한 경영기획팀이 쓰러진 2002호의 보험처리 전반을 맡게되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보험업무를 책임지게 된 팀장의 보조 역할을 맡는다. 그는 이 조선소의 말단 직원으로 잡지사 기자라는 경력을 갖고 재취업에 성공한 이직자다. 타부서에 비빌 언덕 하나 없는 그에게 각 팀의 자료를 취합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는 바짝 엎드린 자세로 사람들 사이에 부대낀다. 기업과 사람을 중심에 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일부 독자들은 만화 <미생>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주인공의 성장이나 성취에 초점을 맞춘 소설이 아니다. 구조 속에 있는 개인을 조명한 게 아니라, 개인을 통해 구조를 이야기하는 책이라는 점에서 <누운 배>는 <미생>과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소설의 배경은 중국에 있는 한국 기업의 조선소다.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인력도 시설도, 구조적인 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팀장은 유능한 해상사고 전문가를 스카우트하고 이전에는 없던 기초 자료들을 창조하면서까지 불명확하던 이 사고의 이유를 '천재지변'으로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한다. 우여곡절 끝에 상황은 애초의 목표였던 '전손처리'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의외의 복병이 회사 내부에서 나타나고야 만다. 회장이 신년 경영계획 회의를 통해 "배를 일으켜세우겠다"라는 예고 없던 계획을 선언한 것이다. 회장의 선언은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겠다는 조물주의 말처럼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는 혁신을 빌미 삼아 '직원들의 사기 진작', '기적', '할 수 있다는 믿음' 따위의 그럴싸한 말로 자신의 계획을 포장했으나, 사실 그 말에는 적정한 선에서 보험금을 지급받고 배를 다시 수선한 후 되팔아 판매금까지 남기겠다는 속셈이 숨어 있다. 회장이 말하는 혁신이란 그런 것이다.

"회장은 경영계획 회의보다 배를 일으키자고 사람을 선동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관리 체계를 세우는 것보다 당장 돈이 굴러들어올 거리에 마음이 가 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귀가 있고 생각이 있으면 임원들의 횡설수설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상관없었다. 회장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틀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회장의 힘이고 지위고 회장을 둘러싼 찬란한 광배였다. 회장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강력하게 군림했다." - 84쪽

회장의 공표 이후 상황은 기이하게 흘러간다. 매일 야근하며 하달받은 목표를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팀장의 승진은 누락되었고, 회장의 심복이라 불리던 사람들은 큰 업무 성과도 없이 그의 비위를 맞추며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손에 쥔 권력으로 회사를 쥐어짜기 시작한다.

"회장이 훗날 감방 갈 때를 대비해 사육하는 개라는 모진 농담까지 도는 곽 상무"(93쪽)는 인사담당 총무가 되어 직원들의 연봉 유보 및 삭감을 강요하고, 외주업체들의 단가를 후려치며 계약을 종용한다. 그로 인해 춘절(설) 연휴가 지난 후 한 달이 지나도록 외주업체의 진공 복귀율은 40퍼센트를 밑도는 수준이 되었다. 회사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지만 대대적인 지출 절감을 통한 여유 자금 확보로 누군가는 웃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해한 혁신이란 그런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회장이 주입한 일종의 '주문'과 같은 혁신을 이룩하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이익과 실리를 계산한다. 회사는 표면적으로 더 큰 그림을 위해 도약을 준비 중인 것처럼 직원들을 선동하지만, 그 과정의 실상은 사실상 붕괴에 가깝다. 회장이 말한 ‘배를 세우겠다’라는 혁신이란 대책 없이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그래서 더욱 허무맹랑한 미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덥석 물어버린 사람들은 자신 위에 군림하는 존재를 부정하지도, 의심하지도 않는다. 소설은 사고 이후, 수면 아래 잠겨 있던 거대한 배의 밑바닥을 들춰보듯 집단 구조의 실상을 파고든다.

누운 배는 누구의 모습인가

이 바닥의 실상을 잘 알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 전개되는 '이 바닥의 실상'이란, 그래서 더욱 여과 없이 사실적으로 투영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 집단의 상징성과 인물 간의 갈등 관계, 세밀한 상황 묘사들은 아홉 명의 한겨레문학상 심사위원의 시선을 압도하며 232편의 경쟁작을 물리친 힘이 되었다. 여기에는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처럼 잡지사 기자 출신으로 조선소에서 3년간 근무했던 경험이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책을 중반부까지 읽게 되면 독자들은 가슴 언저리가 답답해져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 속에 설정된 '조선소'라는 배경은 결국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든 마주할 수 있는 집단의 가상이기 때문이다. '누운 배'로 상징되는 현실 속의 집단들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존재한다. 작게는 나의 직장, 크게는 모두의 아픔으로 기억되는 참사들, 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각기 다른 공동체… 어쩌면 그것을 모두 끌어안고 있을 이 사회 전체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조리가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주인공 역시, 잠시 동안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혼란을 겪게 된다. 권력을 손에 쥔 이들의 처세가, 앞뒤 생각 않고 맞서는 팀장의 태도보다 현명한 것은 아닐지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뒤에는 대책 없는 팀장의 행동으로 자신의 자리 역시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주인공의 혼란 역시도 집단 속에서 갈등하는 불안한 개인을 상징한다.

소설 말미에 주인공은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집단의 끝을 예상했고, 그 속에 퇴행할 자신의 앞날을 짐작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회사를 위해, 아니 자신 위에 군림하는 그들을 위해서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마음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을 설득하는 정 이사의 말처럼 "좀 참고 기다려볼 수" 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도처에서 목격한 퇴행들을 말했다. 점점 더 소진당하는 젊은 직원들, 풀리지 않는 생산과 관리의 문제점들, 사람을 쥐어짤 듯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과 쥐어짜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처지. 이대로 가면 회사는 몰락할 수밖에 없고 몰락하는 회사에서 나는 아무 전망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모든 배후에 그것들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풀 능력조차 없는 기고만장한 임원들이 있었지만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 309쪽

누운 배를 보며 동상이몽에 빠져 있던 이들의 결말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을까. 소설을 통해 난잡한 현실을 목도한 우리는 이제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고 또 선택해야 할까. 작가는 책의 후반부 '작가의 말' 지면을 빌려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좋은 소설은 늘 나와 내 처지를 비춰볼 수 있는 반듯한 거울이었다. 부족한 것이 많지만 이 소설 역시 그렇게 읽혔기를 바란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있었으나 강요하려는 것은 없었다." – 334쪽

이 소설 속의 누군가는 나와 너무도 닮아서 책을 읽는 몇 번이고 "나와 내 처지를 비춰볼 수 있는 반듯한 거울"이 되어주었다. 부디 그 거울이 젊음을 소진당하는 직원들뿐만 아니라 우리 곁에 존재할 또 다른 회장, 사장, 양 이사, 곽 상무와 같은 이들에게도 자기 반성의 기회를 안겨줄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330여 쪽의 소설은 차라리 부정하고 싶은 오늘날의 현실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글 : 임인영(북D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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