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시장 <세기의 재판>만남후기
최근 계속해서 터지고 있는 법조계의 비리로 인해 나라 곳곳이 시끄럽다. 각종 뇌물과 로비로 얼룩진 법조계의 실체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쉰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의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야말로 참담함을 느꼈을 터. 이에 오랫동안 인권변호사로 활약해온 박원순 서울시장이 <세기의 재판>(한겨레출판/ 2016년)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정의의 의미를 새롭게 재확인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책은 지난 1999년에 펴낸 책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한겨레출판)를 17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엮은 것이다. 그는 8월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 ‘다리’ 니콜라오홀에서 <세기의 재판> 출간기념 북토크를 열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 책을 통해 10건의 역사 속 재판을 소개한다. 모두 우리 사회에 귀감이 될 인물들로 예수, 소크라테스, 잔 다르크, 토머스 모어, 드레퓌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이 있다. 모두 당대의 법정에서는 죄인으로 몰리며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결국 역사 속 법정에서는 위대한 승리를 쟁취한 이들이다.
"이 책은 저를 초판클럽에서 면하게 해준 책이다"라며 말문을 연 그는 "당시 책을 쓰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10년간 자료를 모았다.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비롯해 하버드대학 도서관에서는 한 달간을 머물며 관련 책과 논문을 모았다"고 집필 당시의 후기를 전했다.
"인권변호사를 하면서 현실의 법정보다 역사의 재판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예수님도 당대에는 혹사를 당하셨지만 결국 인류를 구원한 지도자가 되지 않았나.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역시 신을 모독한다며 이단행위로 재판받았다. 이들 모두 당시에는 엉터리 주장을 한다며 사기꾼으로 몰렸지만 결국 이들로 인해 역사가 바뀌었다"라고 책의 집필 동기를 전했다.
그는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책이 총 세 권으로 나왔어야 하지만 서울시장이 되면서 시간이 부족해짐에 따라 한 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고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의 판매 금으로 등록금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던 영국의 유학생을 도울 수 있어 보람 있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날 북토크의 사회를 맡은 유정아 전 KBS 아나운서가 책에서 소개한 재판 중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건을 꼽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그는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꼽았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턱에서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음을 감당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의 핵심 사상인 부활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겠나. 소크라테스만 봐도 그렇다. 옥중에서 간수가 빼내주겠다고 제안을 했지만 그는 제안을 거부했다. 만약 감옥에서 간수의 제안을 수락하고 도망갔다면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이 있었겠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죽을 자리를 잘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육체적,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자신이 목숨 바쳐 던져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선택하는 문제다."
그는 오늘날의 대한민국 사법부가 과연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고 있는지, 정의의 편에 서 있는지 자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연이어 터지고 있는 법조계의 비리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는 살다 보면 양심과 원칙을 지키든, 현실과 타협을 하든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라고 했다. 만약 이때 타협을 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의 끈을 놓치고 있는 것이라 잘라 말했다. 한번 타협을 하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타협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약간의 불편과 고통이 따를지라도 양심과 정의, 상식과 원칙에 충실하다면 훨씬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정의란 각자의 몫이 각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재개발만 봐도 그렇다. 재개발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이들은 집을 소유한 사람이거나 부자들이다. 동의하지 않는 49%가 있어도 동네를 밀어내고 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쫓겨날 수밖에 없는 거다. 법이 그렇게 되어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화된 힘’을 강조하셨다. 나 역시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재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신이 변론을 맡았던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을 꼽았다. 이 사건이 벌어진 때는 1993년. 재판을 통해 수면으로 떠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성희롱은 만연하게 자행됐다. 일례로 직장 안에서 여성들이 차 심부름을 하거나 술 시중드는 것을 당연시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이었고 6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성희롱이 명백한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는 계기였으며 한국의 양성평등에 기여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서울시장으로서 교육의 지향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독일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나치 정권은 투표로 선출됐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700만 명의 유태인이 살해당하고 전쟁에서도 패망했다. 이에 독일은 깨어 있는 시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정당과 기관을 통해 수많은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독일은 교육의 나라이며 굉장한 국가 경쟁력을 가졌다. 서울시 역시 지난해 평생학습지도원(서울시 평생학습포털)을 만들었다. 현재는 민주시민교육센터도 만들고 있다. 계속 지켜봐 달라."
이어 대중교통 이용 시 청소년기본법상 24세 이하 청소년들도 청소년 요금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에, ‘반드시 고민해보겠다’는 답변을 남겼다.
또한 역사를 돌이켜보면 늘 시대를 바꾸는 이들이 청년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4.19혁명이나 5.18민주화운동을 비롯해 조선시대 유생들만 보아도 왕이 부당한 결정을 내리면 도끼를 올려놓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한 의혈정신이 없었더라면 우리 역사는 훨씬 더 불의로 가득 찼을 것이다. 요즘 사회가 청년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결국 청년들이 용기를 내서 단결하고 도전해야 희망을 만들 수 있다”라고 전했다.
사법부의 저울이 기울어져 있어도 한참은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오늘날. 양심과 정의는 외면한 채 침묵으로 일관했던 이들에게 박원순 서울시장의 한마디 한마디는 명징한 호루라기가 되어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취재 : 운효정(북DB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