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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Sep 13. 2016

시골 사람은 착하고 엄마는 따뜻하다는 '착각'

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도시의 친구들이 지리산 피아골 우리집을 방문했을 때, 이들의 반응은 거의 같다. 우선 차에서 내리면 저 푸른 하늘과 하늘만큼 푸른 산을 쭉 훑은 뒤 말한다. 

"이야! 이런 데 살면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겠네!"

주변 환경 덕에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산 좋고 물 좋은 이 땅의 시골은 모두 사람으로 미어 터질 텐데.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시골은 텅 비어 쪼그라 들었고, 도시는 수십 년째 불패의 신화를 쓰며 지금도 팽창 중이다. 

날이면 날마다 웃고, 즐기며,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시골? 그런 곳은 '6시 내 고향' 같은 TV 프로그램에만 있다. 현실에 그런 유토피아가 정말 있기나 할까? 나는 아직 듣도 보도 못했다. 도시의 친구들은 또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야, 이런 데서 글 쓰면 베스트셀러 작품이 그냥 나오겠네!"

그래,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좋은 환경이 베스트셀러 작품을 만들어 주기만 한다면, 히말라야는 물론이고 이 세상 끝까지 가겠다. 돈이 많이 들어도 빚을 내 꼭 가고 말겠다. 베스트셀러 책 인세로 그 빚 다 청산하면 되니까. 

주변 환경이 글까지 써 주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 자주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르는 자기계발서는 주변 환경 따위와 상관없이 개인에게 ‘하면 된다’ ‘최선을 다하라’라고 강권하지 않나. 환경과 글쓰기, 크게 관련 없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시골의 삶을 자주 부러워하고 동경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평생을 산 어르신들은 대체로 그런 부러움에 시큰둥하다. 언젠가 내가 이웃 어르신에게 "시골이 좋아서 서울을 버리고 내려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르신은 콧방귀를 꼈다. 

"단단히 미쳤구만! 그 좋은 서울을 버렸으면 정신이 나간 거지." 

오해와 편견은 믿음이나 종교로 승화되기도 한다. 신앙에 가까운 시골을 향한 믿음 중엔 이런 게 있다. 

"시골 사람들은 참 인심이 좋아!"

이 말은 언제,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그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이 말이 자주 이용되는 장소는 쉽게 알 수 있다. 시골장을 찾는 도시 사람들이 이 말을 자주 쓴다. 칭찬이나 감탄사로 나오는 말이 아니다. 시골 할머니들이 파는 물건을 싸게 후려치려고 할 때, 어떻게든 값을 깎으려 할 때, 어김없이 저 말이 나온다. 

"시골 사람은 인심 좋다는 데, 깎아주셔야죠!"

이럴 때 “인심 좋다”는 말은 도시 사람들의 강력한 무기다. 일종의 명령이기도 하다. 그들의 뜻대로 응하지 않으면, 이쪽 사람은 순식간에 야박한 사람이 된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는 상황. 이런 말도 안 되는 룰은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일까.

오해와 편견 속에 살아가는 우리...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이런 오해와 편견이 어디 시골에서만 작동하겠는가. 우리 모두는 많은 오해와 편견 속에서 살아간다. 신앙에 가까운 편견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지 싶다. 모욕에 가까운 이런 말을 보자. 

"전어를 구우면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

세상에나. 여성이 집 나간 사정을 고작 전어 한 마리의 고소함으로 뭉개버리는 과감함에 대한 고찰은 잠시 뒤로 미루자. 역사적으로 따졌을 때, 그리고 일상에서, 가정을 버린 남자가 많은가 여성이 많은가. 처자식 버린 남자는 많지만, 이들은 남편과 아이를 떠난 여성보다 더 많은 비난을 받지 않는다. 

하나의 말은 시대와 상황을 반영한다. 아무리 전어가 맛있다 해도 여성에 대한, 특히 남자의 가정에 귀속된 며느리에 대한 무시와 차별이 아니면 감히 저런 비유와 표현은 만들어질 수 없다. 웃자고 하는 말에 너무 과민 반응을 보인다고?

덕담 차원에서 "어여 취직해서 사람 노릇 해야지"라는 친척 어르신 말에 상처받고, 궁금해서 묻는 "아직도 결혼 안 했어?"라는 질문에 짜증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내가 웃기다고 상대방도 웃어 넘길 거라는 생각은 때로 강력한 흉기가 된다. 이맘 때면, 이런 말도 세상에 많이 나온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정말이지 일상이 한가위 같으면 이 나라는 벌써 망했을 거다. 명절 뒤에 이혼율 급증하는 건 이제 뉴스도 아니다. 명절 스트레스가 얼마나 크면 사람들이(특히 여성들이) 가정을 다 쪼개겠는가.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은 사실 여성들이 차려주는 밥상, 술상 앉아서 받아 먹는 남자들에게만 좋은 말이다. 명절 노동은 여성에게 당연한 의무로 통하지만, 남자가 그 노동을 분담하면 그는 단박에 '좋은 남자' '좋은 남편'으로 등극한다.  

곧 많은 사람이 '어머니 품' 같은 고향으로 향한다. 사람은 따뜻함, 아늑함, 치유, 편안함을 생각할 때면 엄마 품을 떠올린다. 경험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하지만, 이런 생각과 상상 역시 누군가에겐 부담과 폭력(?)이기도 하다. 

따뜻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은 엄마는 순식간에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악녀 중의 악녀가 된다.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따뜻함, 아늑함, 편안함이라는 감정노동까지 해야만 한다. 정말로 엄마는 원래, 그런 존재였을까?

<모성애의 발명>은 이 질문에 좋은 설명을 해준다. ‘모성’이란 두 글자는 극단적인 느낌을 준다. 앞서 말한 세상의 모든 편안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걸 감당해야 하는 여성에겐 정말이지 저 말만큼 무서운 게 또 있을까 싶다. 

책에 따르면, 모성은 본능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측면이 크다. 육아와 교육을 위해 여성을 집에 묶어둬야 하는 시대의 필요성에서 ‘모성애’는 만들어졌다.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여성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엄마는 원래 그런 거야’라는 명령과 당위가 탄생한 셈이다.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만 유리하다. 시골 사람은 원래 착하고 인심 좋은 게 아니다. 그런 사람은 도시에도 많다. 엄마는 원래 따뜻하고 편안한 존재가 아니다. 엄마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편견과 오해의 폭을 줄이는 명절이 됐으면 좋겠다. 상대방에게 ‘착함’과 ‘따뜻함’을 강요하지 않는 연휴. 자고로 명절이란, 원래 그런 거다.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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