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만 하는 부모, 상처 받는 아이
후배 이야기다. 그는 학창 시절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우등생이었다. '1등 턱'이라고 아는가? 우등생 아들 덕분에 후배 부모님은 주위 사람들한테 밥 사는 게 일상이었다.
후배는 일류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어렵다는 시험공부 중 하나를 시작했는데, 그 공부를 20여 년을 했다. 그러면서 나이가 마흔이 넘었고 그동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공부만 계속하는 가장을 둔 가족의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했을까? 연로하신 부모님은 본인들 생활비를 쪼개서 아들 가족의 생활비를 계속 지원해주셨다. 늘 1등만 하던 아들이 언젠가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서 그 노고를 다 씻어줄 거라는 기대를 절대 포기하지 않고.
부모님이 알아서 척척 해주는 세월이 40년이 넘어가니 후배는 스스로 돈을 벌거나 처자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후배 아내를 부러워했다. 시부모가 알아서 생활비를 주니 얼마나 좋냐고.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제 속이 썩는 걸 누가 알겠어요?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않은 자식을 부모가 생활비 주면서 결혼시키는 건 절대 하지 말아야 해요."
한번은 아내가 남편에게 "이제 공부를 그만두고 취직하라"고 했는데,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평생 공부밖에 모르는 아들에게 돈 벌어오라고 했다고 시부모가 노발대발하신 거다. 이런 하소연을 들으니 후배의 아내가 그간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이해가 됐다.
얼마 뒤 똘똘한 아내가 두 팔 걷어 부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다행히 그 가족은 안정을 찾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잘 살고 있지만 가족이 겪은 오랜 마음고생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
흔히 부모가 아이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 "10년만 참고 공부하면 남은 인생 80년이 행복하다." 그런데 책임감 없는 1등 자식은 10년 행복하고 80년 불행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하는 건 본인도 좋고 부모님도 행복하고 가르치는 선생님도 흐뭇하다. 그런데 공부만 잘하는 것이 꼭 행복한 게 아닐 수도 있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지인의 아들이었다. 중학교 때 양자역학에 대해 혼자 공부할 정도? 도대체 양자역학이 뭔지… 나는 엄청 심오하고 어려운 학문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주변 엄마들은 그 아이를 부러워했다.
"우리 집 애랑 어쩜 이렇게 다를까?"
"저 엄마는 뭘 먹고 저런 아들을 낳았을까?"
"나도 저렇게 똑똑한 자식 한번 키워보면 좋겠다."
그런데 그 엄마의 고민은 따로 있었다. 아이가 공부는 잘하는데 친구가 없단다. 주변 사람들과 어울릴 줄을 모른다는 것.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늘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단다. 학교 친구들이 양자역학을 알까? 엄마나 동생이 물리학을 알까? 집에 와도 방문 닫고 잘 안 나온다고. 그 엄마는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르겠다고 항상 걱정이었다.
그런 아들 걱정에 아들이 원하는 건 다 해준 지인 부부. 공무원이던 남편은 자식에게 더 잘해주고 싶다고 직업까지 바꿨다. 자식이 그 부모의 마음을 알까? 똑똑한 아들은 학원을 다니다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한두 달 단위로 학원을 바꾸니 엄마가 학원을 등록했다 취소했다 학원을 전전했다. 심지어 아들이 집에서 먼 고등학교로 진학하겠다고 해서 우겨서 갔는데 한 달 만에 그만뒀다. 다른 학교로 전학이 쉽지 않아 부모가 고생했다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요구사항이 많은 아들을 보면서 주변에서는 아들이 잘나서 그렇다며 오히려 부럽다고 했지만, 그 부모는 아들 눈치 보느라 너무 힘들게 살았다.
부모는 전부, 특히나 자식 앞에서는 "No"라고 거침없이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이든 쉽게 그만두는 건 좋지 않다. 시작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게 해야 한다.
"이거 하고 싶어요."
"그래? 해."
"그만 할래요."
"그래? 그만둬."
이건 좋은 부모의 자세가 아니다. 가끔 애들 적성 알아본다고 이것저것 시켜봤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하는 부모가 있는데, 그렇게 적성 알아보다가는 세월 다 간다. 신중함과 꾸준함을 길러주는 연습이 중요하다.
앞의 사례에서 두 가정의 아들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첫째, 공부를 잘했다. 둘째, 경제적으로 큰 부족함을 못 느꼈다. 셋째, 부모가 봉이다. 넷째, 책임감이 없다.
그들은 공부 잘하는 것 하나만으로 부모 밑에선 천국처럼 살았다. 하지만 스스로 뭔가를 책임지는 것은 배우지를 못했다. 이런 자식을 둔 부모는 대개 이렇게 말한다. "자식 때문에 눈 못 감는다."
책임감은 기른다고 표현한다. 잘 기르면 어떤 비바람과 폭풍우에도 쓰러지지 않지만 잘못 기르면 산들바람 아니 입김에도 휙 날아가는 깃털이 될 수도 있다. 여러분의 소중한 자녀에게 책임감을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막중한 책임 중 하나다.
※ 본 연재는 <말만 하는 부모, 상처받는 아이>(김은미, 서숙원/ 별글/ 2016)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글 : 칼럼니스트 김은미, 서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