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일[노동]
2부 사회적인 힘
“우리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비로소 그 해답이 주어진다. "
- 하인리히 폰 지벨
6장 일[노동]
“인간은 자기 삶에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
- 조지 오웰
우리는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삶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격언을 되새기며 무위도식을 경계합니다. 우리는 일의 소중함을 잘 알며, 일에 귀천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속내를 다 드러내 말하진 않지만, 우리 자신이나 자녀가 장차 고된 일을 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에 양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동을 소중하고 신성하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노동’의 어원은 미성숙하고 의존적인 인간, 즉 노예를 뜻하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노동은 자유를 잃은 자의 행위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노동이라는 개념을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노동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travail’과 스페인어 ‘trabajo’는 모두 라틴어 ‘trepaliare’에서 왔습니다. 이 단어는 ‘고문하다’, ‘고통이나 괴로움을 주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일’(job)이라는 단어가 ‘고통’이나 ‘괴로움’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욥’(yob)에서 유래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구약성서 <욥기>에서 욥은 큰 시련을 겪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일’의 본질이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의 상징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수학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사람들이 집에서 놀지 않고, 굳이 일터에 나가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하루 네 시간만 일하는 사회가 더 나은 삶을 가져올 뿐 아니라, 더 고상한 문화를 꽃피울 것이라 믿었습니다. 실제로 역사 속 위대한 문명이나 예술 작품, 기념비적인 과학 발견은 모두 노동자가 아니라, 여가라는 사치를 누린 계층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고대부터 문명과 교양 있는 개인을 길러낸 건 노동이 아니라, 노동에서의 자유였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롭게 살려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노동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가난한 자들이 떠맡을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노동이 자유인을 타락시킨다고 보고 경멸하고, 반대로 게으름은 신이 준 선물로 찬양했습니다. 현대의 감각으로 보면 이 주장에 거부감이 들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을 직시한 솔직한 표현일지 모릅니다.
플라톤은 지주의 삶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일하지 않고 자신의 토지를 감독하는 ‘한가로운 생활’을 덕망 있는 삶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찮은’ 사람에게 맡겨야 하며, 국가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시민은 노예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주가 직접 일하는 것은 지나친 탐욕으로 간주되어 비판받았습니다.
플라톤은 노동자가 농업이나 수공업, 상업 같은 기술에 숙달되어야 하지만, 깊은 사고력이나 합리적인 지성은 그다지 요구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노동자의 식욕이나 성욕이 노동의 동기가 될 수 있으나, 지나치면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주정뱅이나 탐식가,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이 훌륭한 농부나 상인, 사업가가 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고 말하며, 노동자가 좋은 결과를 내려면 인내와 절제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노동자는 꾸준한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노예와 농민, 소매상인이 고귀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가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 이상에 따라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자유인은 일하려는 욕구가 거의 없었습니다. 가능한 한 일을 피하고, 노동 없이 사는 삶을 바랐습니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세네카(BC 4~AD 65)는 “먹고살기 위해 일상의 모든 시간을 고된 노동에 바치는 건 결코 아름답지도, 선하지도 않다”고 말했습니다. 철학자 키케로(BC 106~43)도 모든 임금노동을 비천하게 여기며, 자유인이 할 짓이 못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동자가 받은 임금은 노예가 되어준 대가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도매로 사서 소매로 파는 일도 비천하다고 했는데, 이윤을 남기려면 온갖 거짓말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지배층은 하층민 노동을 경시하면서도, 그들의 노동이 국가에 이롭다고 보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일하지 않으면 종종 반란을 일으켜 사회를 뒤엎을 수 있었기에, 노동은 사회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중시되었습니다.
현대인도 여전히 일은 곧 ‘고통’이라는 인식이 크게 바뀌지 않은 듯합니다. 미국 텍사스주 여성 1,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쉬거나 퇴근 후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었습니다. 반면 가장 싫은 순간은 출퇴근길과 업무 시간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시간은 하루 평균 3시간 40분에 불과했습니다. 미국 노동자의 69퍼센트는 자신 직업에 만족하지 않으며, 일부는 자신의 일을 매우 혐오한다고 밝혔습니다.
여론 조사 기관 갤럽이 142개국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직업 만족도는 충격적으로 매우 낮았습니다. 갤럽은 이 현상을 ‘세계적인 위기’로 규정했습니다.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갖고 헌신하는 직장인은 13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일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전념하지 않는 직장인은 63퍼센트나 되었습니다. 심지어 아침에 출근하는 것조차 몹시 힘들 뿐 아니라 직장을 증오하고, 크고 작든 노골적으로 반항하는 노동자도 24퍼센트에 달했습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3억 4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됩니다.
우리나라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2018년 한국노동연구원 조사에서 노동자의 75퍼센트가 자신 직업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답했습니다. 주된 이유는 낮은 임금과 긴 근로 시간입니다. 노동자는 출근길은 물론, 저녁을 준비하거나 아이를 재울 때조차 항상 일을 떠올립니다. 근무 시간은 과거보다 줄었을지 몰라도, 우리는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일에 묶여있습니다. ‘발전’된 사회의 모순은 여가 시간에도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노동에 대한 반감과 스트레스를 더욱 키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노동자 2~3명이 과로로 숨진다는 조사도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그래서 상당히 축소된) 자료를 봐도, 매년 600명가량이 과로사합니다. 생산 체제가 이처럼 비정상이니, 많은 사람이 일을 꺼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동을 사랑하라고,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 비판 활동 단체인 크리시스(Krisis)는 노동에 숨겨진 공공연한 비밀을 알려 줍니다. “노동은 노동자의 욕구나 의지와는 무관하다. 노동에는 사회적인 의미가 감춰져 있다. 자본주의 상품생산 체제에서 노동은 가치 증식 원리에 따라 노동자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돈으로 전환하는 ‘소모 과정’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무위도식을 부끄러워하고, 노동을 존중해야 한다고 느끼는 데는, 언어에 스며든 일 중심의 표현도 한몫합니다. 우리는 파트타임보다 온종일(full-time) 일하는 걸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주말은 다음 주를 위한 재충전 시간으로 봅니다. 노동은 충만함이나 중요한 것과 연결되지만, 여가는 잠시 멈춤(break)이나 빠진 상태(being off), 공백(empty time)처럼 표현됩니다.
이런 언어는 마치 삶의 본질이 일에 있는 듯한 메시지를 반복해 각인시킵니다. 그 결과 일은 정상적이고 중요한 행위가 되고, 다른 활동은 부차적이고 사소한 걸로 취급됩니다. 이 은밀한 언어 습관은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자각하지 못한 채 우리의 가치관을 만들고, 노동 중심의 현실을 더욱 고착화합니다.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1943~ )는 직장인의 삶을 노예에 비유하며, 젊은이들에게 임금노동자의 길을 선택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왜 스스로 노예의 길을 택하는가? 제정신인가? 남에게 고용되는 순간, 자유의 90퍼센트를 내버리게 된다. 인생 전체를 남의 손에 빼앗기는 일이다. 지시에 따르고 인형처럼 취급당하며, 퇴직 후 제2의 인생이라는 거짓으로 점철된 무지갯빛 꿈을 꾸는 동안 당신의 존엄성은 철저히 무시된다. 안정된 직장이란 아버지의 무사안일주의에서 태어나며, 어머니가 심어 준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직장인이란 직업은 없다 치고, 일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윤리학자 조안 시울라(1952~ )는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가령 세 자녀를 둔 싱글맘에게 ‘여기 직장에서 일하고 싶지 않으면 떠날 수 있다’거나, ‘여기 노동조건이 마음에 안 들면, 애초 취직하지 말았어야지’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녀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녀는 어디서 일할지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실행할 수 있는 선택권은 없습니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무직자는 자유로운 가요? 휴식이나 휴가가 거의 없어 책과 문화를 접할 여유조차 없는 사람은 자유로운 가요? 1년 내내 단 하루도 쉬지 못해 여행 한번 갈 수 없는 사람은 자유로운 가요? 생계유지가 매일매일의 전쟁이 되어버린 사람은 자유로운 가요? 재능은 있어도 학비가 없어 배움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가요? 모든 걸 할 수 있는 자유 앞에서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상황이 아이러니합니다. 사회이론가 조지 피처는 노동자가 왜 자유롭지 않은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유 사회라는 거짓 이름으로 불리는 것의 정체는 매우 최근의 발명품이다. 재산 없는 사람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어떤 권리도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사유재산이 토지를 독점하면서 가난한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모두 파괴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은 삶을 지탱할 안전판이 박탈되었다. 고용과 충분한 임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데, 누구도 이 사람이 안전하게 살아가도록 고용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케테 콜비츠 <가난>(1901)
콜비츠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깊이 공감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의 작품 <가난>은 실업자가 많고 사회 봉기가 잦던 시기, 방직공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그린 희곡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삽화입니다.
노동의 존엄성을 강조했던 밀레의 <이삭 줍기>(1857)와 달리, 콜비츠는 혁명과 투쟁만이 우리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으며,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저항을 강렬한 이미지로 담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