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engagement)

- 6장 일[노동]

by 북다이제스터



일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며, 근면과 성실을 강요하는 ‘세련된 기술’이 여전히 개발되고 있습니다. 회사는 노동자의 여가까지 빼앗아 가며 저녁 회식이나 맥주 파티, 체육대회, 산악회, 친목회 같은 각종 행사로 노동자의 불만이나 소외를 무마하려 합니다. 일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하는 경영진은 노동자가 더 오래 일에 몰입(engagement)하도록 새로운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있습니다.


회사는 ‘인간중심 경영’이라는 미명 아래 노동자를 한 가족처럼 포장합니다. 동료애나 이윤 나누기(profit sharing), 주인의식(ownership), 애사심을 강조하며 노동자가 스스로를 회사나 경영진처럼 힘 있고 부유한 존재로 여기게 만듭니다. 애사심이 부족한 구성원이 많아지면, 이기적인 행동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데 많은 비용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이 아닌 사람에게 주인의식을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건 가당치 않습니다.


심리학자 엘튼 메이오(1880~1949)는 노동자의 임금 인상과 노조 결성을 막고자 ‘인간중심 경영’ 연구를 사업가 록펠러(1839~1937)에게 제안했습니다. 록펠러 재단은 낮은 임금에도 노동자가 행복하다고 느끼게 할 방법을 찾고자 이 연구를 적극 지원했습니다. 메이오의 연구는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잘 대우받는 듯 믿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노동자를 관리자의 조작에 쉽게 흔들리는 단순한 존재로 간주했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이 도입되자, 전 세계 경영진은 종업원에게 보내는 따뜻한 미소가 임금 인상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습니다. 결국 인간중심 경영은 노동자에게 달콤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당한 노사 협상을 대체하는 미사여구에 불과합니다.


경쟁과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는 노동자는 불안과 고독, 소외를 느낍니다. 소외된 노동자는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하니 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회사가 원하는 건 ‘내가 원해서 하는’ 직원입니다. 그렇지 않은 노동자는 시킬 때만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업은 중간 관리자를 계속 늘리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자신 삶의 모든 것을 바쳐 일하지 않으니, 위협하거나 통제할 관리자가 더 많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사실 중간 관리자는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이면서도, 자본가의 입장을 대변하며 동료 노동자를 억압하는 역할을 자임합니다. 이는 노동자를 분열시키고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며, 허위의식을 만들어내는 ‘사회적인 힘’ 때문입니다. 그 힘은 우리가 지옥 같은 현실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하고, 노동자가 스스로 기꺼이 그 체제에 복종하도록 길들입니다.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일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조차 잊게 됩니다. 이렇게 무감각해진 노동자에게 자본주의는 계속 일할 동기를 부여합니다. 그 핵심이 바로 ‘소비주의’입니다. 소비주의란 소득과 지출이 늘수록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노동자를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자네가 일하기 싫어하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퇴근하면 월급 받은 돈으로 보상받을 수 있지. 집엔 자네가 주문한 싸구려 소비재가 잔뜩 쌓여 있을 걸세. 그토록 원하던 행복은 그걸로 얻을 수 있을 거야. 직장에서 맛본 비참함도 그걸로 잊을 수 있지.” 노동자는 이렇게 기계화된 노동과 소외된 삶을 견디기 위해 ‘보복 소비’로 잠시나마 현실을 잊습니다.


소비는 더 많고 더 비싼 물건을 사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줍니다. 심지어 싸구려라도 더 많이 소비하면 ‘소확행’이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노동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소비는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고, 현실에서 도피하게 만드는 마취제이자 아편 같은 역할을 합니다.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89)는 이런 소비하는 삶을 ‘코미디’라 불렀습니다. 나날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소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소비, 문제를 잊기 위한 소비는 결국 우리 삶을 코미디로 만들어 버립니다.


지금 우리나라처럼 소비주의가 아무런 비판 없이 번창하는 곳도 드뭅니다. 미국도 비슷하지만, 그곳엔 반소비주의 전통이 일부라도 남아 있습니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는 소비주의가 도를 넘어섰습니다. 소비해야 일자리가 생기고, 경제가 성장하며, 잘 사는 나라가 된다는 논리가 사회 전반을 지배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라는 ‘사회적인 힘’에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소비주의의 본질은 현실 문제를 능동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고 체념하게 만드는 완화제에 불과합니다. 소비주의는 현실의 모순을 심리 문제로 환원해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본질은 건드리지 않고, 뭔가 해소하라는 속임수입니다. 기존 지배 체제와 질서에 순응하게 만들어, 이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결국 소비주의는 우리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사유와 실천을 가로막습니다.


노동자는 아무리 많은 상품을 소비해도 여전히 불행하고 불안합니다. 그러면 자신 소득이 부족하다고 결론짓고, 불행의 원인을 잘못 판단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필요하다는 감정에 시달립니다. 지금도 힘들게 일하지만,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해 더 빨리 승진하고 더 많은 돈을 벌겠다고 다짐합니다. 물질적인 만족은 잠시일 뿐,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소비 규모는 커지고, 일과 소비의 악순환만 반복됩니다. 행복을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 소비를 택하면, 결국 빚에 시달리거나 최대 수입만 좇는 고갈된 영혼만 남습니다.


자본의 술책은 임금노동자를 빚에 빠뜨리고, 그 빚이 쉽게 사라지지 않도록 만들어 노동자가 빚 갚는 일에 전념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 결과 임금노동자의 빚은 과거 노예제에 못지않게 심각해졌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노예처럼 사는 사람 대부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빚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빚에 의존하고, 현대사회의 지배계층은 과거 노예주나 식민지 지배자처럼 빚으로 임금노동자를 통제합니다. 현대인은 융자나 주택담보대출 같은 부채를 갚기 위해 빚이 없을 때보다 더 순종하고, 더 오래 일하며, 더 기진맥진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19세기 초 토크빌은 자유주의 자본주의 국가에 사는 대중이 직면할 위협으로 소비주의를 지목했습니다. 그는 대중이 노예 상태가 되어 조용히 사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권력이 유혹하는 길을 따라 사치로 배를 채우는 미래를 예견했습니다. 그가 ‘연성 독재’(soft despotism)라 부른 이 개념은 무섭게도 21세기 우리 사회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농부들의 춤.jpg

피터르 브뤼헐 <농부들의 춤>(1567?)



이 그림은 농민 생활의 소박한 묘사가 아니라, 도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성스러운 봉헌축제의 날임에도 사람들은 술과 춤에 빠져 경건함보다 세속적인 즐거움을 좇고 있습니다.


브뤼헐이 그린 인물들은 대부분 고된 노동에 지친 농민과 노동자들로, 초점 없는 눈동자를 통해 그들의 삶에 깃든 공허함과 무기력을 드러납니다. 이들의 축제는 풍요의 증거라기보다, 고된 노동 속의 고통을 잠시 잊기 위한 일시적인 도피처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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