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 목동, 어부, 비평가

- 6장 일[노동]

by 북다이제스터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어느 고려인은 현지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에서 한때 일했습니다. 수입은 좋았지만, 기업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다시는 일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을 준다고 해서 회사가 일하는 사람의 전부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용주가 일의 대가를 지불하여 할일을 다했다고 여긴다면, ‘일’의 개념은 이렇게 확장될 수 있습니다. ‘고용주는 정당한 권한을 갖고, 고용인은 그 권한에 종속된다. 고용주는 명령할 권한과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징벌할 권한을 가진다. 순종은 고용의 조건이며, 고용인은 모든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상품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동력은 사람과 분리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용주가 노동력을 마음대로 다루면, ‘노동력’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사람’의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 실체까지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 관점은 곧 착취 문제로 이어집니다. 예컨대 감정노동자인 콜센터 직원이 심지어 자신의 자유와 존엄까지 판다고 계약했더라도, 회사가 그걸 사는 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회사는 일자리와 월급을 빌미로 사람을 착취할 수 없습니다.


청년 시절 마르크스는 분업이나 전문화에서 벗어난 삶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오늘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가축을 기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적인 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사냥꾼이나 목동, 어부, 비평가가 되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마르크스의 젊은 시절 주장은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일본 노동운동은 이를 실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전업(全業) 노동 반대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전문화와 분업이 실업과 경쟁을 부추긴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의사 등 일부 직업을 제외하고, 다양한 파트타임(화초에 물 주기, 컴퓨터 수리, 커피콩 고르기 등)으로 생계를 꾸리며, 남은 시간엔 지역 봉사나 취미 활동, 문화 활동, 여행 등으로 인생을 즐기자는 운동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이런 프리타(フリーター, 정규직이 아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를 큰 사회 문제로 봅니다. 하지만 필요할 때만 일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도 1,200만 명 정도가 ‘다운시프팅’ 운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1994년 시작된 이 운동은 적게 벌고 적게 쓰며, 바쁜 일상을 줄이고 여유와 인관관계를 중시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이를 ‘소비 포기’ 운동이라 부르며 표지 기사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독일은 탈물질주의 문화가 널리 확산되어, 많은 사람이 소비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검소한 생활은 노동 시간과 소비를 줄여 삶의 질을 높이며,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을 늘리는 걸 목표로 합니다. 이는 끝없는 자본 축적에서 벗어나 공생 윤리를 실천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다운시프팅을 ‘삶의 질을 위해 돈을 덜 벌어도 괜찮다’는 넓은 의미로 본다면, 영국과 미국 인구의 25퍼센트 이상이 이미 이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운시프팅은 ‘정통’ 경제학 시각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인간을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존재로만 보기에, 단순한 삶을 위해 소득을 줄이려는 이런 흐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더 단순하고 자유로운 삶에 대한 선택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이 되고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걸 죽을 때 후회할 사람은 없다’는 서양 격언을 아직 경험하진 못했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노인학 연구자 칼 필레머(1954~ )는 『이 모든 걸 처음부터 알았더라면』(2011)에서 노인 1,000명을 인터뷰해 그들이 평생 살아오며 얻은 황혼의 교훈을 전합니다.


“노인 1,000명 중 그 누구도,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해 원하는 물건을 살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만큼 부자가 되거나, 더 많이 가지는 게 성공이라고 한 노인도 없었다. 원하는 미래 수입을 기준으로 직장을 선택하라고 조언한 노인도 없었다.”


노인들은 좋은 우정을 나누고, 개인 안위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일에 참여하며, 자녀와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걸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필레머는 인터뷰 결과를 정리하며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자녀들은 당신의 돈이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원하며, 특히 당신이 곁에 있길 바란다.”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 위험합니다. 우리 행복을 시장(市場)이나 고용주 손에 맡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용주는 노동자의 자기 계발이나 자아실현을 위해 다양한 동기 부여 방법을 찾습니다. 하지만 이는 악순환을 낳을 따름입니다. 노동자는 더 많은 걸 원하고, 경영자는 더 많은 걸 약속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노동자는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양측 모두 이상적인 일터를 찾아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이상적인 일터는 없습니다. 우리가 직장에 과도하게 몰입해 예속되면, 일과 삶 모두에 대한 통찰력을 잃게 됩니다. 회사는 당신 영혼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당신 노동력에만 관심을 둡니다. 하지만 당신은 단순히 노동자로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분업이나 전문성이 요구하는 바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노동력이 아닌, 삶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규정하고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 <오디세우스와 사이렌>(1909)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승리에 취해 사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는 모든 선원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돛대에 묶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아름답고 황홀한 사이렌의 노래를 들었지만, 선원들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노를 젓는 선원들은 노동자의 삶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노력한 결실을 누리지 못합니다. 억지로 하는 노동 속에서, 노동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채 소외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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