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일[노동]
현재 전 세계에서 수렵이나 채집 같은 원시생활을 하는 인구는 25만 명이 채 되지 않아, 인류 전체의 0.003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반면 500년 전만 해도 인류의 80퍼센트, 3억 5천만 명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흔한 오해와 달리, 원시사회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힘들게 식량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하루 서너 시간만 활동해도 생존에 충분한, 아니 그 이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주 옛날부터 수렵채집인이 풍부한 식사를 했다는 증거 중 하나는 인간이 비타민 C를 스스로 합성하지 못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대부분 동물은 한 가지 먹이로도 평생 문제가 없지만, 인간은 비타민 C를 포함한 다양한 영양소를 음식으로 섭취해야 합니다.
대부분 동물은 간에서 비타민 C를 만들지만, 인간은 4,000~6,000만 년 전 유전자 돌연변이로 그 능력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돌연변이가 사라지지 않은 건, 숲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풍부한 식물과 과일에서 충분히 비타민 C를 섭취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다양하고 풍부한 식단을 누렸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농업이 시작되며 식단이 곡물 중심으로 바뀌자 비타민 C 결핍증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원시사회 사람들은 원하면 더 많은 식량을 얻을 시간과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더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문했을 것입니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을 모으면, 그건 어디에 쓰일까?” 남에게 빌려주어 이자를 받거나, 누군가를 고용해 일을 시키는 데 쓰일 것입니다. 그러면 부는 불어나고, 결국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가 벌어집니다. 원시인들은 이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축적’이 당연한 자본주의 사회에선 이런 사고방식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필요 이상으로 일하는 건 대부분 타인이나 사회의 강제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시사회에는 그런 강제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원시사회의 특징입니다. 원시사회는 기술이 부족한 무능한 사회가 아니라, 불필요한 과잉을 거부한 사회였습니다.
18세기 유럽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했을 때, ‘원시인’ 인디언들의 삶이 오히려 자신들보다 낫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1706~90)도 “야만적인 삶을 맛본 미국인은 다시 우리 ‘문명’ 사회로 돌아와 살 수 없었다”고 인정했습니다. 실제로 인디언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난 ‘문명인’ 백인들은 다시 숲으로 도망쳐 ‘야만인’ 인디언과 함께 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인디언 마을로 도망친 백인들은 미국 사회의 농부나 납세자보다 훨씬 자유로운 삶을 누렸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그 자유는 더욱 매력적이었습니다. 어느 백인 여성은 자신을 ‘구출’하려는 동포들을 피해 도망치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만큼만 여유롭게 일할 수 있어요. 당신 도시에는 나만큼 독립적인 여성이 단 한 명이라도 있나요?” 실제로 백인 수백 명이 황야로 도망쳤지만, 반대로 인디언이 백인 사회로 간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인디언 사회는 물건을 사고파는 대신, 오직 선물만 주고받았습니다. 누군가 죽으면 그의 소유물을 모두 파괴해 본인이나 가족 재산을 늘리려는 유혹이 없었습니다. 추장은 가장 적게 소유한 사람이었고, 가진 것 대부분을 나누어 언제나 감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인디언들은 재산이 아니라 위엄과 지혜, 정신적인 숭고함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집에서 함께 식사할 수 있었습니다. 물건은 실제로 필요해 사용될 때만 누군가의 소유물로 인정되어,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누구나 마음대로 쓸 수 있었습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도둑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인디언 사회에 동화된 많은 백인은 풀려나도 ‘문명’으로 돌아가길 거부했습니다.
원시사회뿐 아니라 1300년경 유럽 사회도 부 축적에 큰 관심이 없어 휴일과 축제가 많았습니다. 경제사학자 줄리엣 쇼어(1955~ )에 따르면, 당시 유럽인은 연중 3분의 1을 쉬었습니다. 스페인은 5개월, 프랑스는 거의 6개월에 달했습니다. 농부들은 생계에 필요한 만큼만 일했고, 더 벌기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 추산에 따르면 1495년 빅토리아 시대의 평범한 농부는 공유지에서 연 15주만 일해도 1년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쇼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시절 삶의 속도는 느렸다. 선조들은 여가를 풍요롭게 누렸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런던인의 뼈는 현대인을 제외하면 역사상 가장 키가 크고 영양 상태도 양호했습니다. 특히 여성의 키가 더 컸습니다. 북유럽 채석장은 고대 이집트가 피라미드 건설에 사용한 양보다 더 많은 석재를 생산해 고딕 성당을 지었습니다. 물론 전쟁 시기엔 기근과 빈곤을 겪었지만, 평화로운 시기엔 빈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좋은 시절은 사라졌을까요? 한 가지 이유는 ‘시간은 돈이다’ 같은 은유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은유는 하나의 개념을 성격이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시간이라는 ‘본래 개념’이 돈이라는 ‘부가 개념’과 연결되면서, 그 의미가 확장되거나 변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시간을 바라보고 사용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집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1901~81)은 “주체는 은유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했습니다. 주체가 언어의 주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언어가 주체를 지배합니다. 그는 주체의 독립적인 사고를 단호히 부정했습니다. 언어가 사고의 실질적인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지만, 결국 언어에 지배받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시간은 돈이다’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하는 틀이 됩니다. 우리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믿고, 여가는 생산적이지 않은 시간으로 여기며, 심지어 인간관계마저 투자와 이익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라캉이 지적했듯, 우리는 스스로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라 여기지만, 실은 은유에 의해 형성되고 제한된 존재입니다.
비교사회심리학자 로버트 레빈(1945~2019)은 31개국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습니다. 산업화되지 않은 지역 사람들은 ‘시간 낭비’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을 어떻게 낭비할 수 있나요?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일을 하고 있을 텐데 말이죠. 친구와 이야기하거나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우리가 하는 일이죠.”
반면 우리는 ‘시간은 돈’이라는 믿음 속에서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은유가 우리의 생각을 조정했기 때문입니다. 산업화는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를 요구하고, 그에 쓰이지 않는 시간은 낭비로 간주됩니다. 이제 바쁘지 않다는 건 금기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바빠?”나 “할 일 많아?”라고 묻고, 대개는 “일에 파묻혀 죽을 것 같아!”라고 답합니다. 반대로 “아니, 별로 할 일이 없어”라든지 “아니, 바쁘지 않아”라고 말할 용기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제 “바빠?”는 “안녕, 잘 지내?”를 대신하는 인사가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평균 기대수명은 30세였습니다. 100여 년 전 비교적 풍족했던 유럽인은 평균 47세까지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보다 두 배 이상 오래 살지만, 체감상 더 오래 사는 걸까요? 오히려 우리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 그들보다 훨씬 짧게 사는 듯합니다. 오늘날 80~90년을 살아도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네덜란드의 어느 여성 코미디언은 이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한마디로 정리했습니다. “내 할머니는 투표권이 없었다. 내 어머니는 피임약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없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깊이 관계 맺을 시간이, 집단의 일원으로 창조적인 일을 할 시간이, 주어진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누릴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온몸의 근육과 감각을 온전히 쓸 시간이 없습니다.
물론 현대 노동자는 산업혁명 시기보다 적게 일합니다. 1870년대 평균 70시간이던 노동 시간은 지금 40시간으로 줄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감소폭은 미미합니다. 계산기가 암산을 대신하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문서 보관과 전달의 수고를 줄이고, 다양한 기술이 업무 절차를 대체해 인력 수요를 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현재 주 40시간 근로가 과도하다는 증거는 많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업무 시간은 하루 6시간 이내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 시간 단축 요구가 커지고 있습니다. 노동 시간을 줄이면, 경제 성장 중심의 노동 사회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천연자원 남용을 3분의 2로 줄이며, 실업을 완화해 고용이 보장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노동 시간을 줄여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일’의 개념이 너무 좁아, 직장 일 때문에 ‘더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한때 삶의 모든 것이었던 중요한 일들, 곧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이웃과 함께 하던 일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돈을 버는 일만 가치 있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생산적’이지 않아도 중요한 일은 많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며,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고, 이웃 간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며, 정치 문제에 참여하는 등 가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사회를 움직이는 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무시된 돌봄 활동 같은 ‘보이지 않는 마음’(invisible heart)입니다.
하지만 ‘정통’ 경제학은 시장성이 없고 보수가 없는 일은 가치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 기준에 따라 정책 결정자들도 거래되지 않거나 상품화되지 않는 일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자원봉사나 부모의 돌봄 노동은 분명히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오직 ‘완전고용’만을 목표로 삼습니다. 이는 국가 경제성장의 지표인 국내총생산 때문입니다.
국내총생산은 시장에서 거래된 상품과 서비스의 총가치를 기준으로 계산됩니다. 가령 어느 나라의 일인당 국내총생산이 높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여성이 노동 시장에 더 많이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일터에 나가고 아이를 유아원에 맡기면, 국내총생산은 증가합니다. 여성 소득과 육아도우미 소득이 모두 국내총생산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국내총생산은 가격이 붙어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만 반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성인이 되지 않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며, 특히 청소년기에 겪은 경험은 아이 성격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보살핌 없이 폭력에 노출된 아이는 충동적이고 수동적이며 폭력적인 성향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 같은 학대로 생긴 트라우마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에 변화를 일으켜 뇌 발달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사회는 아동 양육 시기에 뿌린 씨를 거둡니다. 학대를 겪은 아이는 쉽게 화를 내고 충동적이며, 의심 많은 성격을 지니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부모가 모두 직업을 가진다면, 10대 자녀가 겪는 흡연이나 무단결석, 학폭, 아동 비만 같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요? 부모는 회사에서 낮은 직급에 전망도 없으며, 고용도 불안정한 파트타임 일자리에 매여 자녀를 돌볼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일은 일 이외 삶을 잠식합니다. 오히려 일하지 않는 삶이, 일하는 삶보다 더 큰 의미를 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