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

소설 쓰는데 발버둥치며 열정을 불태우는 이유

by 김케빈




내가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한 건 그것도 다시 미친 듯이 쓰기 시작한 건


영원할 것 같은 젊은 시절이 생각보다 너무나도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3,4 년 전만해도 20대였고, 1,2년 전만해도 그래도 20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앞자리가 바뀌었다.

처음 한두달은 몰랐으나, 지금은 점점 내 감정선이 바뀌는 걸 느끼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현실 속에 파묻히고 찌들어버리는 것이다.

삶 속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위대했던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 혹은 천재들의 높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 안주하는 삶 밖에는 없다.


나는 그걸 경계하는 거다.



몇몇 사람들이 탁자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 나이가 50대 넘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치매가 든,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든 장모를 모시느라 생기는 고충을 한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공감을 하면서 들어주고 있었는데


나는 듣다가 소름이 끼쳐서 그 자리를 도망쳐나왔다.



지금은 20대는 지난, 갓 30대이지만. 저자리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러 있으면

금방이라도 저렇게 나이가 들어버릴 것 같은 공포감이 몰려왔었다.



1분 1초라도, 시간이 더 지나고 나이가 더 먹으면

젊은 감성으로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될까봐

나는 그게 두려웠다.



다 썩어문드러져가는

현실에 찌들어가는 감성으로 작품을 쓰게 될까봐 공포스러웠다.



적어도 그렇게 되기전에 작품을 쓰고 싶었다.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을 쓰고 싶었다.

나는 판타지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면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고되고 비참하다.


하지만 판타지는 그런 것들을 완벽히 부인하고 이상향을 보여준다.

설령 고난이 있더라도, 모두 극복하고 행복이 영원영원히 이어지는

해피엔딩을 보여준다.


현실에서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부서지고 깨어지다가

마음에 상처만 입고 신음하다가

마침내 절망하고 범죄를 저지르고

손가락질을 받다가

사람들이 눈길 하나 안 주는 노숙자로 전락하는

그런 엔딩 따위는 없다.


오히려 잘나가고 갑질을 하던 악역이

노숙자로 전락을 한다.

현실에서는 반대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소설, 특히 장르소설에서는

프롤로그가 비참할 수는 있어도 엔딩이 비참하지는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절망에 빠져서

결국 자살을 하거나 차에 폭탄을 붙이고

가게에 들이박아서 수십 명을 죽이거나 하는 엔딩은 없다


현실에서는 수두룩하다.

각종 증오범죄, 테러...

뉴스를 10분만 보고,

회사생활을 하루만 해 보고

사람이 많은 데서 10분만 이야기를 듣고 있어도 들릴 것이다.


가깝게는 철없는 동생 하나 때문에

부모가 다쳐서 소년가장이 되어버린 사람이

힘들게 번 돈 수백만원을 한순간에 날린다.


자식들은 부모가 그런 병에 걸리면

직접 찾아가지 못할 경우에


그들을 대신해 줄 사람을 고용할 수준의

경제력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조차 갖추지 못했다.


취업 외에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

실질적으로 먹고 사는 것, 능력을 키워서 진짜 자기 능력, 좋아하는 것 등등을 활용해서

돈을 버는 것은 전혀 가르치지 않는 쓸데없는 학교만을 고집하는 교육에만 몰빵해서 폐인이 되는 아이들이 허다하다.


스카이 캐슬의 결말 대신, 스카이를 가서 대기업에 갔지만 1년 뒤 절반이 때려치고,

미쳤냐면서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 반대편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 노후준비를 부모가 하지 못해서

같이 먹고 자고 산다는 이유로 부모의 빚을 감당해야 하는 자식.

교육은 언제나 뒷전인 부모와 자식.

현실세계는 이와같이 고개를 한 바퀴만 돌려도 끔찍한 것으로 가득하다.


내가 판타지를 계속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런 것들로부터 가까히 하지 않기 위해.

처음에는 저런 것들을 어떻게하면 문제를 해결을 할 수 있을까 고민도 해 보았다.

그래서 내 꿈은 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기존의 좋은 학교에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오래오래 버티는

그걸 위해서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몽땅 무시하고

쓸데없는 공부에 투자하지 않게 하고


하고 싶은 일,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서

자신의 능력으로 먹고 살수 있게 만드는 학교.

사업을 차리고, 이러면서.


사업은 나에게는 아주 기초단계다. 코칭을 간신히 시작할락 말락 하는 단계.

하지만 소설은 그보다는 진도가 좀 더 나가있다.



소설 세계관 속에서는 저런 것들을 부숴 버릴 수가 있었다.


심지어, 아예 직장인을 양성하는 현재의 교육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알맹이를 싹 다 바꿔버리리는 것도 소설 속에서는 가능하다.


간접적으로 모델을 제시를 하는 것도 가능했고, 인물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현대사회에 대해서,

사람들의 관념관습에 대해서 디스를하는 것도 가능했고, 그런 개혁이 모두 이뤄진 사회를 구현하는 것도 가능했다.


도피라고 봐도 되겠지만, 일단 판타지를 보러 온 것 자체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도 쓰는 나도 카타르시스를 위해서다.


특히 가짜 교육을 가르치는 것이나, 가족이잖아, 하면서 자식에게 빚을 지우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 증오하는 것 중 하나다.


비관적인 팍팍한 현실에 렌즈를 고정하느니, 낙관적인 판타지를 생산하는 게 낫다.

물론 보는 것도 좋다. 하지만 쓰는 건 다르다.


판타지는 결말이 해피앤딩인 만큼 낙관과 희망의 글이다.

괜히 판타지가 아니다.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찬 현실에는


0 혹은 한없이 0에 수렴하는 것이기에


판타지라고하는 것이다.


가짜 교육을 통해 취업을 한 사람들이 겪는 일.

그런 비참한 상태로 프롤로그가 시작이 되더라도


언제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나는 그래서 판타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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