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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e Jun 23. 2020

베란다

나의 환경을 용인하기



와이파이가 고장 났다.

그날 밤은 tv도 노트북도 핸드폰도 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30%, 할 수 없이 80%로 책을 읽는 수 밖엔 없다.

동기야 어찌 됐든 마음의 양식을 쌓았다는 조금의 뿌듯함과 함께 내일은 꼭 와이파이를 고치리라 마음먹었다. 기사님이 내일 오신단다.


집에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방문할 계획이 잡히면 꼭 치르는 의식이 있다.

바로 '여기 있는 짐을 눈에 보이지 않도록 저기로 옮기기'이다.

'저기'는 보통 베란다를 지칭한다.

집 면적보다 짐의 면적이 더 큰 우리 집은 날씬한 여자 둘도 겨우 정면으로 통과할 만한 통로를 갖췄다.

수리 기사님은 보통 남자. 남자는 우리보다 덩치가 클 것이므로 그들이 움직일 공간을 확보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짐을 베란다에 쑤셔 넣었다. 드디어 드러난 공간에 쌓인 먼지도 닦았다.

이 정도면 남들이 사는 집과 같겠지.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게 보여야 한다. 음 이 정도면. 보통의 집 같아졌다.


다음 날, 기사님이 오셨다. 장비 가방이 기사님 몸집만 하다.

앗, 통로를 지나가기가 좀 버거우실 것 같은데.

기사님은 몸을 비틀고 가방을 비껴서 요령 있게 통과하지만 냄비 뚜껑이 움찔한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안방까지 진입했다.

이제 공유기를 갈기만 하면 끝난다. 연극은 곧 끝날 것이다. 나는 다시 평화로운 짐의 세계에서 보통의 하루를 보내게 되리라.


그런데 기사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공유기만의 문제가 아닌 듯싶다.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시더니 베란다를 좀 봐도 되겠냐고 묻는다.

...

나는 시체를 베란다에 숨겨놓은 범죄자가 되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나도, 기사님도.


베란다를 열어보는 일부터가 난관이었다.

베란다로 향하는 좁은 공간에 들어서기 위해서 기사님은 몸을 비집었다.

다음 난관은 광케이블을 짐 사이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기사님은 빨래 더미에 엎어진 바가지처럼 짐 위에 몸을 완전히 엎어놓아야 했다.

그렇게 케이블을 점검하고 다시 공유기로. 또다시 베란다로.

 

시체를 숨겨놓은 내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괜히 전자레인지를 돌리고 가스 후드를 열었다.

소음을 내서라도 어떻게든 그 상황과 분리되고 싶었다.

기사님께 죄송한 마음과 짐의 세계를 들켜 창피한 마음이 나를 차지하려고 전쟁을 벌인다.

패자는 없다. 아니, 패자는 나다. 두 승자는 서로 손을 맞잡고 나팔을 불고 박수를 쳐 댄다. 머리가 울린다.


기사님은 선을 무사히 연결했다. 하지만 짐이 많아 이 상태로는 마무리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짐 정리가 다 되면 연락 달라고 명함을 주셨다.

"짐이 너무 많죠..." 나는 최소한의 죄송함을 전달했다.

"허허 그럴 수도 있죠..."

기사님은 끝까지 친절함과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그 차분한 목소리가 나를 약간 진정시켰다.


이놈의 베란다를 어떡하지.

이사를 갈 수 없는 노릇이다. 서울 아파트 중위 가격이 9억을 넘겼댔다.

짐을 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든 짐들의 필요성이 떠올라 짐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런 집 많다는데, 정말 그럴까. 나 조금은 안심해도 되는 걸까. 그 한 마디에 온 마음이 기댄다.


베란다는 잘못한 게 없다. 짐들도 잘못한 게 없다. 단지 미래에 사용될 어느 날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도 잘못한 게 없다. 짐들이 다 들어가기 벅찬 집에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엄마도 잘못한 게 없다. 짐의 유통기한을 보통 사람들보다 길게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은 누구도 잘못한 게 없고 그 벌로 창피함을 받은게 아니다. 내가 선택한 창피함인 것이다.

남들과 다른 환경에선 창피함을 느낄 수 있고

대부분은 타인은 의식하지 못한 채 내가 찔려서 느껴지는 창피함이다.

남들과 다른 환경에선 때때로 창피함을 느낄 수 있고 그 몇몇 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아주 보통의 삶이다. 당장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비관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히려 아무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생산적이다. 아무도 잘못한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다.


그래서 베란다를 공개하는 데 익숙해지기로 했다.

베란다를 당당하게 열어두기로 한다.

꾸역꾸역 차 있는 짐들을 너그럽게 놔두기로 한다.

정리할 수 있는 짐은 정리해보기로 한다. 짐의 양은 줄일 수 없어도 짐을 예쁘게 놓아둘 수는 있는 것이다.

나의 환경을 너무 미워하지 않기로 하자. 나의 환경을 용인하기로 하자.

나의 환경에서만큼은 와이파이를 고친 일이 글감이 될 수 도 있으니.





베란다를 꽁꽁 가려두느라 그렇게 좋아하는 노을도 못 보고 살았다.

베란다를 정리하고 커튼을 열어젖힌다. 노을이 물든다.

오늘 노을은 별로다.

그래도 베란다를 열어놓으니 내일 노을은 얼마나 더 예쁠까 기대하는 재미가 생겨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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