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정화시켜주는 한 소년의 이야기
마음이 탁해질 때(?) 읽기 좋은 소설
어린 왕자. 성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고, 인터넷에 떠도는 짤방으로 소설의 일부는 경험해봤을 유명한 책이다. 나도 고등학생 때 읽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갑자기 이 책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어렸을 땐 문장의 겉모습만 보고 좋아했던 것 같은데,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니 글 하나하나가 눈을 통해 마음에 쏙쏙 박히는 느낌이다. 순수함에서 오는 무지함이 오히려 닳고 닳은 내 맴을 정화시켜주는 느낌이랄까.
인간 실격의 다자이 오사무처럼 어린 왕자의 주인공도 생텍쥐페리의 삶을 닮았다. 책에 나오는 '나'도 비행기 조종사로 사하라 사막에서 사고를 당해 어린 왕자를 만났는데, 작가 생텍쥐페리도 비행기 조종사로 일했고 1944년 7월 코르시카 해상을 비행하던 중 행방불명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외국 서적을 읽으면서 '번역가'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는데, 이렇게 글의 내용을 잘 전달한 사람이 누구일까 살펴보다 '황현산'이라는 번역가에 대해서도 잠깐이나마 알게 된 즐거운 순간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해 어린 왕자를 처음 만난다. 그리고 어린 왕자가 그동안 다녀온 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어린 왕자는 소행성 B612에서 출발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 보니 어린 왕자가 별에서 만난 사람들은 사회에 존재하는 어른들의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묘하게 공감이 되면서 생각에 잠기는 부분이 많았다.
첫 번째 별. 왕
이 왕은 절대 군주였지만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 "짐이 만일 어느 장군에게 바닷새로 변하라고 명령했는데 그 장군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면, 그건 장군의 잘못이 아니라 짐의 잘못이니라." 어릴 땐 이 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남에게 탓을 하지 않는 포용력이 넓은 왕이구나.
두 번째 별. 허영쟁이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할 때 답례를 하기 위해 모자를 쓰고 있다. 다른 말에는 대꾸도 없다가 칭찬에만 반응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사람들이 있지.
세 번째 별. 술꾼
나 자신이 부끄러운 놈이란 걸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술꾼. 뭐가 부끄럽냐고 물으니 술을 마신다는 게 부끄럽다고 한다. 그렇게 술을 마심으로써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가 무한정 생긴다.
어린 왕자는 역시 어른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 별. 사업가
얼마나 바쁜지 어린 왕자가 와도 고개조차 들지 않는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 꿈꿀 시간도 없다고 한다.
사업가라 그런지 별을 6억 162만 2,731개나 가지고 있다. 왕이랑 무슨 차이냐고 물었더니, 왕은 지배를 하고 사업가는 소유한다고 말한다. 별을 소유하면 뭐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별을 관리하고 셀 수 있다고 한다. 별들의 숫자를 적어 자물쇠에 채워둔다.
어린 왕자는 다르다. 꽃을 하나 가지면 물을 주고, 화산 세 개에는 청소를 한다. 그 많은 별을 가졌지만 세기만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소유만 하고 소유한 것의 가치를 쓰지 못한다면 그건 진짜 소유하는 것일까?
다섯 번째 별. 가로등 켜는 사람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가로등을 켜라는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처음엔 여유가 있었지만 별은 점점 해가 갈수록 빨리 돌아 1분에 한 번씩 돌아 1분에 한 번씩 가로등을 켰다 끄니 쉴 틈이 없어졌다.
어린 왕자가 조언해줬다. 별이 작으니까 걸으면 계속 아침 햇빛 아래에 있을 수 있다고. '쉬고 싶으면 걸으세요!' 어린 왕자의 이 말이 묘하게 해결책을 담은 위로처럼 느껴졌다.
어린 왕자는 왕, 허영쟁이, 술꾼, 사업가에게 업신여김을 받을 수는 있지만 누구보다 우스꽝스럽지 않는 사람으로 인정했다. 제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정성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별. 노신사
노신사는 지리학자다. 하지만 연구만 하느라 서재를 떠나지 못한다. 서재에서 탐험을 한다. 탐험가의 기억을 기록한다. 산은 변하지 않지만 꽃은 덧없는 것이기 때문에 책에 담지 않는다고 한다. 어린 왕자가 덧없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머지않아 사라질 위험이 있다'는 뜻이라 말한다.
변하지 않는 산. 머지않아 사라질 위험이 있는 꽃. 변하지 않는 것을 기록하는 지리학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막연히 생각에 잠긴다.
일곱 번째 별. 왕 111명, 지리학자 7천 명, 사업가 90만 명, 주정뱅이 750만 명, 허영쟁이 3억 1천1백만 명.. 거의 20억의 어른들이 살고 있는 지구
다들 너무 바쁘고 정신없게 산다. 오직 북극에 하나뿐인 가로등 켜는 사람과 남극에 하나뿐인 그의 동업자, 이 두 사람만 한가롭고 태평하게 살았다. 그들은 1년에 두 번 일을 하였다. 지구인들은 왜이리 바쁘게 사는데도 먹고 살기 빠듯한 것인지..
어린 왕자는 지구에 떨어진 지 1년째 되는 날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떠나는 모습이 죽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런 건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별은 너무 멀어 무거운 몸뚱이를 가지고 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어린 왕자는 뱀에 물려 나무가 넘어지듯 천천히 넘어졌다.
왜 나는 이 책을 두 번째 읽는데 어린 왕자가 죽었는지 몰랐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데 몸이 무거워 껍데기를 두고 간다는 것. 죽음을 또 다르게 표현했다. 어린 왕자는 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일까.
책 뒷면에 해설이 있다. 물론 이 또한 저자가 쓴 글이 아니라면 어느 누군가의 주관적인 의견일 수 있지만 번역가 황현산이 번역을 하며 느낀 속 뜻을 해설로 담았다. 내가 느낀 의미와 해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맞춰보기도 하고, 또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은 깨닫기도 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여우가 말한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
여우는 어린 왕자를 만나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길들인다는 것은 자신이 마음과 노력을 부어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길들인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았다고 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숨차게 끌어모아도 자신의 삶의 시간을 새겨두지 못한다면 누구도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어린 왕자가 만난 왕, 허영쟁이, 술꾼, 사업가 같은 사람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권력자로 사람들 위에 서지만 적어도 나에게 왕은 좋은 리더의 요소를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지리학자도 지식은 있지만 물건 하나하나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다. 그는 알 뿐, 사랑하지 않는다.
존재가 세상에 진정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은 권력이나 소유, 명성이 아니라 '길들임'이다.
어린 왕자는 왜 죽었을까?
어린 왕자는 별들 사이를 이동하며 지구까지 왔지만, 이미 세상의 물정을 아는 그에게 앞으로 다가올 불확실한 여행이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뱀에 물리기로 결심했다. 그가 느낀 깨달음은 순진함을 지불하고 얻은 소득이었다. (어린 왕자가 더 이상 순수하지 않게 되다니..)
1900년 프랑스 출생. 귀족 출신 집안에서 다섯 형제자매들과 풍족한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4살 때 아버지가 사망. 12살 여름방학 때 비행장에서 생애 최초로 하늘을 나는 경험을 했다. 21살 4월 전투 비행단 제2연대에서 군 복무를 시작한다. 비행기 수리 업무를 맡다가 비행기 조종법을 배웠다. 22살에 민간인 조종사 자격증을 받았다. 하지만 1년 뒤 첫 비행 사고를 겪고 두개골에 부상을 입었다. 약혼도 했지만 파혼했다. 26살에 단편소설 '비행사 Aviateur'를 게재했다. 그 해에 라테고에르 항공사에 취직했다. (비행사와 문학 생활을 같이 시작한 것 같다.)
43살 2월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 Lette a un otage'와 4월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를 출간한다. 그리고 44살인 1944년, 자신의 마지막 정찰 임무를 위해 이륙하여 생환하지 못한다. 바스티아 북쪽 1백 킬로미터 부근 코르시카 해상에서 독일군 정찰기에 의해 격추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 집이나 별이나 사막이나 그걸 아름답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야.
- 사람들은 이제 어느 것도 알 시간이 없어. 그들은 미리 만들어진 것을 모두 상점에서 사지. 그러나 친구를 파는 상인은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가 없지.
-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
-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 사람들은 부랴부랴 급행열차에 뛰어들지만 자기들이 찾는 게 무언지도 이제는 모르고 있어.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