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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May 19. 2022

멋진 신세계

2540년, 인간을 완벽하게 생산하는 미래 시대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어두운 미래를 표현한
원조 디스토피아 소설





모든 게 정해지고 모든 게 완벽한

인간 생산 시대

인간은 오직 인공수정으로 태어나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입실론 계급으로 나뉜다. 계급에 따라 신체가 뛰어나도록, 적당히 뒤떨어지도록 만들어진다.

 가족이란 개념을 혐오하며 어머니의 잉태로 태어나는 것을 굉장히 야만적이라고 여긴다. 이들은 <소마>라는 약을 정기적으로 배급받고 감정을 통제받는다. 우울함과 괴로움은 약을 먹으면 모두 사라진다. 그들은 늙지 않는다. 단, 수명은 60세 정도가 되면 문득 죽음을 맞이한다. 화장을 해서 나오는 에너지로 죽음까지도 알차게 사회에 환원한다.

 알파 계급의 버나드는 야만인 보존구역(자연적으로 사람이 태어나는 가족이 존재하는 지역)으로 가 존이라는 청년을 만난다. 우연히 존이 상사인 센터 소장의 아들임을 알게 되고, 존과 그의 어머니 린다를 자신의 세계에 데려온다. 하지만 린다는 사망하고, 존은 버나드가 사는 문명사회와 다름을 느끼고 홀로 떠난다.

홀로 떠난 존. 하지만 그가 가는 곳에서도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듯 사람들은 그를 구경거리로 여기고 결국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시대를 뛰어넘는 어두운 상상력

약간은 지루한 스토리 전개

철학적 고민을 던지는 문장은 덤

1930년대에 이런 소설을 썼다는  흥미롭다. 상상은 누구나 다채롭게   있지만, 2022년에 봐도 그럴듯함이 느껴져 작가가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감탄을 했다. 또한 예전에 봤던 영화들이 떠올랐다. 기차 칸으로 계급 사회를 표현한 <설국열차>, 알고 보니 수백 개의 톰크루즈( 하퍼) 존재했던 <오블리비언>, 최첨단 시스템으로 미리 범죄를 예측하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기계에 점령당해 인간이 사이버 세상 속에 살아가는 <매트릭스>묘하게 비슷함을 느끼며  소설이  영화들에게 영감을  것이 아닐까 싶다.

 초반에는 태아를 계급화하여 인간을 생산하는 스토리에 흥미를 느꼈지만 뒤로 갈수록 살짝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고, 문체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어떤 상황을 묘사한 것인지 이해가 잘 안 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에 잠기게 하는 문장 속에서 잠깐씩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보기도 했다.






주관적 책갈피


만성적인 자책감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잘못에 두고두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오물 속에서 뒹구는 것이 몸을 깨끗이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1946년 작가의 머리글에서



우리는 단순히 노예처럼 자연을 모방하기만 하는 차원에서 인간의 발명이라는 흥미진진한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셈입니다.

자연스러운 인간 생태가 자연을 노예처럼 모방한 것이라는 사고 발상. 흥미롭다.



- 이왕이면 왜 모든 사람을 알파 더블 플러스로 만들지 않나요?

- 알파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틀림없이 불안정하고 비참해집니다. 알파 태생인 사람이 엡실론 반 백치의 일을 해야 한다면 미쳐버릴 겁니다.

다양한 수준의 사람이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알게 하지만, 동시에 그 조화가 완벽하게 인위적이어서 더 잔인하다고 느낀다. 너무나 완벽한 세상(결과물)을 보고 나니 "무슨 의미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결과로 과정이 평가되기도 하지만, 삶이란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가치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3시간 반이라는 잉여 여가는 행복의 원천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은 그렇게 남는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따름이었어요.

오히려 바쁠 때 보다 여유 있을 때 잡생각이 많이 든다. 그래서 무언가 공감되는 부분이었다. 정해진 대로만 살다 보니 정해지지 않은 휴식에 부담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그는 철학을 인간이 본능에 따라 믿는 대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형편없는 이유를 찾아내는 행위라고 정의했어요.

생각의 발상이 독특했던 부분. 기존에 있는 현상을 미래라는 가상의 시점에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문체가 일관성 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소마'라는 약을 먹은 그들은 어떠한 마음의 불편함도 느끼지 못한다. 불행도 박탈당했다. 불행할 수 있는 것도 자유 중 일부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완벽한 통제가 이것인가 싶었다.




주관적 책갈피를 돌아보니, 굉장히 암울한 문장 속에서 묘하게 긍정적인 기운을 받은 느낌이 든다.

천천히 또 한 번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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