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 (14일차)
어젯밤엔 배도 많이 불렀고 제법 피곤했기 때문에 당연히 오늘 늦잠을 잘 거라 예상했었는데 생각보다 늦지 않은 시간에 눈이 떠졌다. 9시였다. 한국에 있을 때, 일이 많고 일찍 일어나야만 할 때는 그렇게 졸음이 오더니 막상 모든 일정이 자유가 되고 마음껏 잘 수 있는 상황이 왔는데도 고작 9시였다. ‘하던 짓도 멍석 깔아 놓으면 안 한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그 옛날 만들어진 속담이 지금까지도 공감을 얻는 걸 보면,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볼로냐에서는 철저하게 쉴 계획이기도 했지만, 오늘은 정말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부실한 여행의 기록이 오늘은 더더욱 수수할 예정이라고 밑밥을 뿌리는 바입니... 콜록콜록.
(2023년 4월 14일 금요일)
“진짜 뭐 하지 우리?” 사회와 중년생은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상의 끝에, 오늘 하루는 무작정 걸으면서 상점들 구경을 하다가 괜찮은 게 보이면 가족 선물도 사고, 배고프면 즉흥적으로 먹기로 했다. 한마디로, 그냥 되는대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는 소리다. 유일한 계획이라면 어제 시작한 지안(사회의 베프) 생축 사진 프로젝트를 중간중간 이어가기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준비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테이블 위에 2유로짜리 동전 하나를 팁으로 올려두고 호텔을 나섰다. 어제 우박이 내려서인지 벌써 4월 중순인데도 밖은 상당히 쌀쌀했다. 중심 대로 쪽으로 나가다가 우연히 걷게 된 Via San Felice(산 펠리체 거리)에서 작지만 눈에 띄는 상점을 발견했다. 머플러나 숄 등을 파는 상점인데 멀리서 슬쩍 봐도 색감이나 재질이 강렬하고 고급스러워 보여서 무심코 지나치는데도 저절로 눈길이 갔다. 문이 열려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좀 이른 시간이라 들어가기 망설여져서 일단 가게 앞을 지나쳐서 주변을 좀 더 걸었다.
첫 손님이 물어보고 안 사면 아무리 우리와는 문화가 다른 이탈리아 상인이라도 기분이 좋진 않을 것 같아서였다. “아무래도 아까 그 집에 가봐야겠어!” 20분도 안되어 중년생이 말했다. 몸은 다른 곳을 둘러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아까부터 그 상점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걸음을 돌려 ‘그 집’으로 향했다. 작은 점포의, 열려 있는 작은 출입문 입구에 주인장이 나와 서 있었다. 거의 삭발한 듯한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 배가 나온 큰 덩치에 인상이 매우 부드러운, 누가 봐도 이탈리아 인으로 보이는 외모의 주인이었다. 우리가 상점 앞에서 망설이자 눈을 마주치고 웃으며 손짓했다. 말은 안 했지만 편하게 봐도 된다고 들어오라고 하는 제스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이끌리듯 안으로 입성했다. 가까이서 보니 옷감들이 훨씬 아름다웠다. 자신을 Marco(마르코)라고 소개한 주인장은 아쉽게도 영어를 전혀 못했다. 사회와 중년생도 영어에 능숙한 편이 아니지만 마르코는 정말 거의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간신히 나라 이름 정도를 말했을 뿐이었다. “차이나?” “재팬?”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한국이라고 말하자 스마트폰을 켜더니 여러 나라의 국기가 나열된 화면을 우리 앞으로 내밀었다. 번역기였다. 우리는 수많은 국기 중 태극기를 찾아서 꾹- 눌렀다. 마르코가 안도한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번역기에다 대고 이탈리아어로 얘기하더니 다시 보여줬다. “죄송하지만 제가 이것으로 대화를 해도 괜찮을까요?” 우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어 보였다.
마르코는 정말이지 이탈리아 여행 중 만난 사람을 통틀어 가장 친절했다. 물론 물건을 파는 입장이라 친절한 것도 당연히 있었겠지만, 그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감동적일 정도로 친절했다. 파는 물건의 역사에서부터 품질과 보관, 세탁법까지 번역기에 대고 열심히 말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가끔 이상하게 번역이 되어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했다. 한참의 설명을 듣고 만져도 보고 둘러도 보며 가족에게 선물할 숄 하나와 머플러 하나를 꼼꼼하게 골랐다.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친 후,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마르코가 노트 하나와 펜을 가져왔다. 펼쳐보니 방명록이었다. ‘너 의외로 귀엽구나, 마르코!’ 중년생은 속으로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사회가 간단한 쇼핑 소감과 함께 방명록을 작성했다. 기념이 될 겸 한글로 뚜렷하게 적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적힌 한글을 신기해하며 만족한 듯 웃는 마르코.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튕기더니 다시 번역기에다 입을 가져다 댔다. 번역기에는 ‘현지인 음식 추천해 줄까?’라고 쓰여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우리 구글맵에서 가게를 하나 찾아주는 마르코. 피자집이었다. 아는 친구가 하는 가게인 것 같았다. 조금 걸어야 하는 위치이긴 했지만 일단 저장해 두기로 했다.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 마르코와 몇 번이나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밖으로 나섰다.
구름이 많이 낀 거리지만 예뻤다. 사회가 ‘지안 생축♥︎’이라고 적힌 작은 노트를 꺼내 곳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건물, 건널목, 지나가는 차, 회랑... 이국적인 풍경이라 어디를 찍어도 분위기가 좋았다.
무작정 걷다 보니 Mercato(시장)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가 보자!” 사회가 외쳤다. 활기 넘치는 시장이었다. 채소, 과일 가게의 색색깔 진열이 예뻤다. 한쪽 구석으로 가니 각종 파스타 면류를 직접 만들어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신기해서 그 진열대를 배경으로도 지안 생축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 이 집에서 먹을 수는 없나? 배고프네.” 사회의 말에 중년생의 배도 꼬르륵 소리로 화답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스탠딩 테이블이 몇 개 있었고, 파스타 면 가게 벽에는 ‘Tortellino in Brodo’라고 인쇄된 종이가 붙어 있었다. “어? 여기서 토르텔리니에 육수 넣어서 먹을 수 있게 판매하나 보다!” 예감은 적중이었다. 연신 면을 만들고 계신 아주머니께 인쇄된 종이를 가리켰더니 오케이를 외치셨다. 잠시 후, 작은 종이 사발에 토르텔리니가 육수에 담겨 나왔다. 위에는 치즈가루도 뿌려져 있었다. 아주머니는 플라스틱 스푼 두 개와 냅킨까지 함께 접시에 담아 주시면서 뒤편 아까 봤던 스탠딩 테이블을 가리키셨다. 쌀쌀하고 배고픈 때 너무나도 안성맞춤인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 토르텔리니는 어떤 맛일까?” 어제저녁 트라토리아에서 먹은 것과 같은 메뉴라서 더 궁금했다. 한 입씩 떠서 물었다. 후루릅. 오물오물. 사회와 중년생이 거의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추운 몸을 녹이는 영혼의 육수에 들어간 방금 빚어낸 신선한 토르텔리니. 천상의 맛이었다.
어제저녁 트라토리아의 토르텔리니도 훌륭했지만 지금 이 맛이 진짜 현지인들의 맛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순식간에 식사가, 아니 흡입이 끝났다. 배가 차니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니 다시 거리로 나가고 싶어졌다. 그 후에도 거리를 걸으며 절친 생일 축하 촬영은 계속되었다.
“이번엔 서남쪽으로 가보자!” 남는 것이 시간이기에 시내 중심에서 안 가본 쪽은 다 걸어가 볼 생각이었다. 걷다가 목이 텁텁해지자 마트에 들어가 어느덧 우리가 사랑(?)하게 된 골리아 캔디(2통 3.9유로)를 샀고, 다시 걷다가 화장실도 급하고 당도 떨어졌을 때 커피바에 들어가 에스프레소(2잔 2.6유로)에 황설탕을 타서 마셨다. 처음엔 의식하지 않고 주문했는데, 뭔지 모르게 흘러넘치는 포스에 주위를 둘러보니 이 바의 직원 모두가 여성이었고 모두가 멋진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커피를 주실 때 작은 잔에 물도 함께 주셨는데 진한 커피를 마시고 입을 헹구듯 물 한잔을 마시니 깔끔했다.
몸을 비우고 카페인을 충전했으니 그다음은? 맞다. 우리는 또 걸었다. 공원도 가고, 작은 광장에서 열린 알록달록 꽃시장도 구경하고, 예쁜 도자기와 나무 그릇을 파는 벼룩시장도 구경했다. 소박한 길거리 장터를 지나자 이번에는 명품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가 나타났다. 명품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회와 중년생은 쭉- 한번 훑어보며 거리를 지나쳐 계속 걸었다. “어? 저기 사람들 완전 많은데 뭐지?” “젤라또다!!!” 명품도 지나친 두 사람이 동시에 관심을 가진 곳은 Piazza Cavour(카보우르 광장) 근처의 젤라또 가게였다.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검색하지 않아도 맛집이 분명했다. 무작정 줄을 섰고, 맛있어 보이는 분위기 때문에 평소엔 한 가지 맛만 먹는 둘도 이번만큼은 두 가지 맛씩 먹기로 했다(2가지 맛 콘 2개 7유로). 역시, 너무나 부드럽고 맛있었다. 이탈리아에 가면 1일 1 젤라또 하게 될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이었다.
먹을 때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많이 걸은 탓일까? 두 사람 다 슬슬 지치고 다리가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해가 길어서 그렇지 시간도 이미 저녁 7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시간이 애매했다. 지금 호텔로 들어갔다가 다시 저녁 먹으러 나오기는 힘들 것 같았고, 다리가 상당히 아픈 지금 저녁식사를 위한 식당을 찾아 나서기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사회가 외쳤다. “맞다! 아까 마르코가 알려준 피자! 포장해서 호텔 가서 먹자!” “최곤데?” 중년생이 극찬으로 말을 받았다. 여기서 잠깐! 이 시간을 빌어 지치고 배고팠던 우리를 살린 마지막까지 친절한 볼로냐의 마르코(트로포야의 마르코 아님 주의/영화 테이큰 안 보신 분에겐 죄송)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우리는 아까 지도에 표시해 둔 피자집으로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걸어갔다. 싱글 피자 두 판을 샀는데, 고른 피자의 이름은 ‘Diavolo’와 ‘I Love You’였다. Diavolo는 우리가 잘 아는 토마토 베이스 피자에 버섯과 고기가 들어가 있는 살짝 매콤한 피자였고, I Love You는 루꼴라와 크루도가 들어간 특색 있는 피자였다. 이름을 재미있게 붙인 것을 보면 요즘 젊은 층이 많이 먹는 트렌디한 피자 같았다. 사서 호텔로 들어가는 길에 마트에서 Ichnusa(이끄누사)맥주도 한 병 샀다. 초반에 로마에서 우연히 마셔보고 너무 맛있어서 기억해 둔 사르데냐 지방의 맥주인데 감칠맛이 최고니 아직 마셔보지 않으신 분들은 기억했다가 한 번 마셔보시라!
일찍 씻고 나와서 TV를 켜고 피자와 맥주를 먹었다. 피로가 녹아내리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제 먹고 잠만 자면 되니 세상 부러울 것 없다는 생각이 드는 저녁이었다. 틀어진 TV에서는 날씨예보가 흘러나왔다. 이탈리아 지도 위에 표시된 해와 구름 표시들. 지금 우리가 있는 볼로냐의 위치를 열심히 눈으로 찾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캐스터 클로즈업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다른 채널로 돌리니 이번에는 스탠딩 토크쇼가 한창이었다. 화면 속 두 사람이 주고받는, 무슨 뜻인지 모를 이탈리아어를 배경 음악 삼아 우리는 여유롭게 피자를 베어 물고 또, 맥주를 꿀꺽 마셨다. 어느덧 밖이 캄캄해졌고, 무거워진 두 사람의 눈꺼풀은 이따금씩 시야를 컴컴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잠이 우리 방에 노크를 계속 해대고 있었지만, 정작 우리는 잠들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 몇 시쯤이었을까? 마지막까지 버티던 희미한 의식의 불꽃이 마침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주위의 소음까지 잠든 것처럼 고요한 볼로냐의 밤이 더 깊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