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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양 Jun 02. 2018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적이라는 것.


 2013년의 군대 시절의 이야기다.


 실제로 병영내에서 폭행이 줄어들고 있던 시기였고, 막 전역하기 시작한 병장들은 후임들이나 군대 생활 자체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점점 병영내는 변화하고 있었고, 바뀌는 병영에 적응하는 기존의 군인과는 달리 신병들은 그저 변한 병영에 적응할 뿐이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다행히도 폭행에는 크게 두려울 만한 군생활이 되진 않았다.


 3개월 만에 분대에 후임이 생겼고, 그 한 달 후에 들어온 신병은 크게 사고를 쳤다.

 새로 들어온 이등병과 일병 선임이 같이 근무지에 올라가서 생긴 일이었다.


 2시간 동안 근무를 선다는 것은 귀찮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말을 걸기도 하는데, 선임 일병은 후임 이등병에게 말했다.

"야, 담배 있냐?"

 당연히 근무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근무태만에 일종이며 징계감이 되기 충분했다.

"이병, ○○○ 담배 없습니다."

 그리고 이등병이 담배를 챙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문제고 실제로 그렇다면 주먹이 나올 것 같은 이야기였다.

"너 뒤져서 나오면 진짜 죽는다."

 선임은 장난같이 위협을 했지만, 후임은 선임이 무서운 만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이등병은 순순히 헬멧 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하... 나... 이 새끼..."


tvn- 푸른거탑 中



 담배를 가져온 것도 웃긴 노릇이고, 어디 선임 몰래 담배를 피우겠다는 생각을 한 건지 선임은 화가 하루 종일 식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 선임의 아래 후임들은 정신교육을 받았다.


 중요한 건 한 달 후였다.

 정신이 나갔다고 해야 할지, '근무지에 담배를 가져오는 신병'으로 낙인찍힌 그 후임은 다른 선임과 함께 근무지에 올라갔고, 결국 선임과 함께 근무지에서 담배를 폈다. 

 그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당연스럽게 발각되었다.

 그리고 전입 온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이등병에게는 당연하지만 안쓰러운 징계가 내려졌다. 물론 그 당시의 선임자도.


 영창 3일

 징계는 받아야 하는 것이었지만, 아직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신병이 벌써부터 영창을 간다면, 앞으로의 생활을 생각하면 얼마나 좌절스러울지 안쓰러웠다.

 그리고 모두가 그 신병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밑도 끝도 없이 욕을 하는 선임도 있었고,

 몰래 때리기도 하는 선임도 있었다.


한국 애니메이션 - 창


 그리고 영창 가는 날이 다가 올 수록 그 후임의 눈은 점점 의욕이 상실되는 것이 보였다. 어떤 행동 하나하나가 뇌를 거치는 것 같지 않았고, 본의 아니게 사고를 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본인의 잘못은 잘 알 텐데, 저렇게 까지 몰아붙여야 하는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나는 오지랖을 버리지 못하고, 타 분대임에도 위로의 한마디를 하러 그 후임을 만나러 갔다.

 그건 영창 가기 전날 밤이었다.

 여전히 그 녀석은 아무런 의욕도 없는 눈이었다.

"일어나."

 나는 그렇게 말했고, 재빠르진 않았지만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침대가 아닌 옛날 마루처럼 되어 있는 침상이기에 내가 올려다 볼 수 있었다.

 그러면 고개를 숙여도 얼굴이 잘 보였다. 

 그리고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말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다른 생각하지 말고, 다시 잘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리하고 와."

"…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녀석은 자신의 관물대를 싹 비우고 잠시 부대를 떠났다.



 분명 영창은 약이 된 모양이었다.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못하며 정좌의 자세로 있다던가, 그 안에 있는 책만 읽을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는 걸 보여주듯, 그 녀석은 매사에 열심히 했고 내가 전역할 때쯤에는 분대장까지 달면서 분대를 이끌 군인이 되어갔다.


 영창을 다녀온 게 약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래 이렇게 잘할 수 있는 녀석인데, 극단적인 일을 경험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보여주지 못한 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건 단순히 혼자만의 판단이라고 할 수 없었다.

 감옥 같은 영창을 다녀오더라도 이전에 쓰레기 짓을 하는 녀석은 쓰레기 짓을 하기 마련이고, 반성을 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바꿔 먹은 거면, 원래부터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결과적으로 그 녀석은 내가 소속된 분대에서 데려오고 싶을 정도로 유능했고 성격도 좋았다. 그건 분명 우리 분대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15개월쯤 후.

 내가 전역할 때, 나는 큰 보답을 받았다.

 나는 그 후임 녀석의 주도에 난생처음으로 헹가래를 받았다.

 아직도 그때 그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연기자 윤시윤의 전역 당시 행가래


 그리고 그 후임은 말했다.


"그때 다른 선임들은 다 욕하고 때리기만 했는데, 정말로 저한테 위로를 해 준건 그 '괜찮아' 한 번뿐이었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사실 영창에 있는 내내 울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다지 깊은 마음이나 감정을 담아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걱정이 돼서 위로를 한 번 해줬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그저 불쌍하기도 했었다. 절대 그 녀석의 앞을 내다보고 한 말은 아니었다. 


"괜찮아."

 그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는 세 글자의 위로였다.


"제가 군대생활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건 영창 가서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 그때 병장님 말씀 때문입니다."

 나에겐 사소한 그 한 마디가 그 녀석에겐 2년 가까운 군대생활을 버티게 할 간절한 한 마디였었다.


 그 한마디가 자신을 살렸다고,

 그 녀석은 나의 전역 선물을 크게 보답했다.

"고맙다. 너도 마무리 잘해라."

 나도 끝까지 사소하게 보답하며, 손을 흔들었다.



 누구나 잘못은 한다.

 수년, 십 수년, 수십 년을 살아가면서 실수를 하지 않을 사람은 절대 없다.

 용서를 받는 것도 어렵지만, 그전에 용서를 구하는 것도 마냥 쉽지 않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분명 있으니까.

 그러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인간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마지막 전역 선물은 그렇게 특별했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위로를 하며, 반성의 계기와 타인에게 인정을 받는 데 도움을 줬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무척이나 기쁜 일이었다.

 



 군대를 가서 청춘을 허비한다는 생각이 물론 앞설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편한 부대에 가서 흔히 말하는 꿀을 빤다고 하는 군생활을 할 수 있고, 누군가는 적응을 하지 못할 곳에 가서 고문관이 되거나 문제를 일으키거나 악형을 준다고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식이 부모님을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2년을 함께할 동료를 얻는 것 또한 자신의 선택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행동과 생각으로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말이죠. 

 저 같은 경우는 간부들의 식사를 챙겼습니다.

 하지만 동기와 후임, 바로 위의 맞선임들은 너무 힘들어하는 게 보여서, 일반 병사들이 접할 수 없는 마실 것이나 먹을 것을 몰래 건네주곤 했습니다. 

 그때 동료애를 처음 느꼈습니다. 전우애가 아닌.

 그런 사소한 배려가 5개월 후에는 저의 생일파티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물론 병장 때쯤 가서는 서로 귀찮으니 그런 것도 없었죠)

 초코파이에 감자 과자를 꽂아준 생일 케이크였지만, 생각하지도 못한 것에 큰 감사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사회의 직장은 또 다르겠지만,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소하게라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싫더라도, 싫은 환경 속에 있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미미하게라도 바꿀 수 있는 게 자신입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은 특별합니다.


 혹시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으시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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