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하기엔 부끄럽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일방적인 마음이니까.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한다는' 말 자체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준다면,
연애도 쉬울 것이고 사랑도 받을 것이고 연애가 나 위주로 된다는 말이 될 수 있지만,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나의 사랑에 의심은커녕 믿음만이 더 강할 거라고 생각했다.
상상은 거기까지였다.
짝사랑은 그렇게 시작했다.
짝사랑은 꽤나 괴롭다.
혼자 끙끙 앓고 그 기간이 길 수록 부정적이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이 편하도록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길 바라면서 그 사람을 바라본다
보통 이런 시점에서 두 가지로 나뉜다.
어딘가에선 내가 좋아하여 시작하는 연애와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서 시작하는 연애 중 어떤 것이 더 좋으니 마느니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건 굳이 논쟁거리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주는 건 행운이며 축복이고,
누군가를 좋아해 주는 것 또한 그 누군가에게 행운이자 축복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내가 그 사람이 좋아하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것 또한 절대적이지 않았다.
#. 오랜 사이
오랜 친구가 있었다.
인연이라고 한다면, 흔히 소꿉친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오랜 인연으로 이어졌다.
부모님들끼리 친구여서 자주 만나고 단 둘이 노는 경우가 많았기에, 더 빨리 친해졌기도 했다.
어릴 적에는 내가 학교에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그 친구는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친구의 엄마는 나이는 같으니까 누나가 아니라고, 누나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그것에 대한 반감은 없었다.
하지만 사는 지역이 조금 달라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나는 시간은 적어지게 되었다. 다른 도시라고 하더라도 고작 1시간의 거리일 뿐인데도.
우리는 각자 다른 지역에서 다른 학교에서 각자의 생활을 하고, 다시 볼 때마다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기대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직 그 녀석이 고등학생일 때 다시 만나게 된 적이 있었다.
"오랜만."
그래도 그 녀석도 사내라고, 모든 골격 자체가 커져 있었고, 나랑 비슷했던 키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개를 올리게 만들었다.
갑작스러운 심장박동은 없었다.
주위에 동급생 남자라도 없어서 그런지, 내가 아는 남자라곤 그 녀석밖에 없었고 그 녀석과 하는 것이라면 뭐든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부터 앞서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
이미 이전부터 특별한 심장 박동은 뛰고 있었고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서로 친구사이였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고, 꼴에 자존심이랍시고 그 녀석이 나를 좋아한다면 먼저 고백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분명 있었다.
욕심이겠지만.
"우리 엄마한테 얘기 들었어?"
그 녀석이 말했다.
"무슨 얘기?"
"나 졸업하면 바로 스코틀랜드로 유학 가거든."
알고 보니 그 녀석의 부모님이 일부러 가까운 도시에 벗어나 외곽지역에서 살면서 맞벌이를 한 이유가, 그렇게 유학을 보낼 돈을 미리 모아두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언제… 가는데? 졸업하고 정말 바로?"
나는 정확한 시기를 물었다.
2월에 졸업하고 3월 초에 간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날짜보다는 나는 다른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 버린다면, 대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내 마음을 전해 줘야 하는 건지, 아니 어쩌면 타이밍이 좋지 못해서 그런 계기로 오히려 아예 얼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인다면 분명 그래도 상관없겠다고 할 순 있겠지만, 차이고 바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똑 부러지지도 않았고, 그 녀석에 대한 마음에 미련이 남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그런 점을 부모님이 친구니까 후에도 계속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불편할 수 있다며 스스로 포장했다.
"유학 가서… 뭘 배우는데? 뭘 하려고 가는 거야?"
나는 그런 질문들을 했지만, 그 녀석의 대답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지금 돌아서면 그때 당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떠올라지지 않는다. 얼마나 정신을 놓았던 것인지 지갑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이야기를 하고 나온 카페에서 휴대폰까지 두고와 다시 찾아가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녀석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반대쪽에서는 단 둘이 걷고 있는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여자가 있었고 그녀는 계속 우리 쪽으로, 그 녀석에게 시선을 똑바로 두고 다가왔다.
"오늘 친구 만난다고 하더니, 여자였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 녀석의 손을 잡으면서.
"오랜 친구야. 우리들 엄마 아빠가 어릴 적부터 친구거든."
그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아무런 걱정 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변명거리도 할 게 없다는 듯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하니, 꽤나 스스로가 삐뚤어졌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 녀석이 미워지기 시작한 걸까.
"여자 친구 구나?"
나는 그렇게 물었다.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생이에요? 친구라면서?"
그 와중에 그녀는 나를 위아래 스캔을 하면서 물었다. 왜 친구인데 대학생인지 그 녀석이 설명해 주고 있었다.
"네, 그래요."
어째서 인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얼마나 사귄 거야? 난 몰랐네. 미리 말해 줘야 할 거 아니야?"
나는 애써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게 없다 보니, 생각도 못했다.
내가 주변에 남자가 없다고 해서 그 녀석 또한 주변에 여자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당연스럽게 한 모양이었다.
"우리? 얼마 안 되었어. 이제 두 달?"
"저기… 얘가 유학 가는 거 알고 사귀는 거예요?"
나는 괜히 질문했다.
괜히라고 말했지만, 제일 알고 싶은 부분이었다.
나는 그 부분에서 어떻게 고백을 해야 할지 고민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당연스럽게 말했다.
"유학은 1년 전부터 정해져 있던 걸로 알고 있었어요. 군대 기다리는 거, 미리 경험해 보려고 해요."
그렇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웃음이 났다.
허무하기도 했고, 정말로 눈 앞의 두 사람이 우습기도 했다. 또 내가 우습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와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다.
나보다 더 못난 것 같았고,
괜한 화가 날 정도로 어이가 없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보다 잘난 게 있는 것 같다면,
확실하게 부러운 게 있다면,
내가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에게 그 사람이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는 것.
그리고 깊이 들어가 내 마음이 아프게 만드는 게 있다면,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 나와는 전혀 다른 타입인 것 같은 그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 점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후에는 생각보다 빨리 잊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유학 간다는 말 때문에 내 마음을 표시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한 시점에 졌다고 생각했다. 나 혼자만의 조건인 줄 알았지만, 이미 내가 모르던 경쟁자는 그 싸움에 이겨내고 있었다.
그 후 그 녀석은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가끔은 돌아오는 모양이지만 그 나라에 정착하듯이 살고 있다. 오히려 부모님이 스코틀랜드에 직접 찾아가서 어떻게 지내는지 보곤 하는 모양이었다.
7년이 지났지만, 그 둘은 아직도 만나고 있는 건지 잘 모른다.
아마 다음에 서로를 보게 될 날이 된다면, 경조사로 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그 사람과 거리를 벌여 버렸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누군가가 호감을 준다고 해서 반드시 연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없었고, 끙끙 앓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 보면 변심하여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서로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채 되려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사랑은 언제나 쉽게, 행복하게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또는 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사랑이 어려운 줄 알기에 소중한 줄 안다고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길 바라며 사랑을 하길 바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