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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양 Aug 01. 2018

X1. 그들은 왜 카페에서 공부하는 걸까.

독서실이 외로웠던 사람.


 길을 걷다가 보면,

 한 동네도 아니고 한 거리에 카페만 세네 곳은 물론 여섯, 일곱 개 까지 있는 거리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카페는 밖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고,

 그 안에는 동네 사람들끼리 찾아와 빙수를 먹으며 수다를 떠는 사람도 있고,

 혼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으며,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누구를 기다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카페 안에서 보기 제일 쉬운 모습은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주변은 시끄럽고, 난잡하기도 하고, 신경 쓰일 점이 많은데 꽤나 집중을 하며 자기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많다. 심지어 노트북에 강의를 켜 놓으면서 까지.


 그러다가 공부를 하는데 카페 손님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하기도 하고, 카페에 공부를 하러 왜 오냐는 말로 논란이 있기도 했다.

 그들을 카공족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일부 시장은 오히려 그런 점을 미리 파악해 스터디를 위한 카페를 만들기도 하고 시선을 끌기도 했다.




 그들은 왜 굳이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걸까.




 내가 직업을 얻기 위한 시험공부는, 학창 시절 12년을 포함하자면 거의 20년까지 이어졌었다.

 그리고 그 공부대로 직업을 얻었던 건 아니지만, 이제는 어떤 '시험의 합격'을 위한 공부는 하지 않는다.

 

 공부 자체가 필요 없어진 건 아니었다.

 개인적으론 영어와 일본어 회화에 관심 있었고, 요리에 대한 공부 또한 계속하고 싶었다.

 그저 이 나라에서 취업을 위해 내가 하기 싫은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배우고 싶고 관심 있는 것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초중고의 생활은 물론이고,

 성인이 되어서도 도서관이나 독서실에 박혀서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공부는 늘,

 나중을 위해 지금의 시간을 바친 공부였고, 부모님이나 선생님들 또한 매번 그런 말씀들을 하셨었다.

"지금 열심히 공부해 놓는 게 다 나중에 편하고자 하는 거야."

 나는 그런 의미의 공부는 그 순간은 물론 미래가 된 지금도 그 공부가 즐거움을 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또한 주변에는 몇 년이 넘어서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는 정말 많았고, 그 수라고 할 수 있는 취준생이나 공시생은 계속 늘고 있었다.

 공부하는 시간 또한 계속 늘고 있었다. 그 시간이 늘 수록 스트레스는 물론 앉아서 공부를 하는 것뿐일 텐데도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무슨 병을 얻기도 했다.

"합격은 엉덩이 싸움입니다! 누가 더 오래 의자에 앉아 있느냐에요!"

 그런 말을 하는 인터넷 강사를 봤지만, 병을 얻을 줄 몰랐다.

 

 그 친구들은 현재가 즐거운 건 아니었다.

 결국 미래에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기 위해 지금 노력할 뿐이었다.

 

 나 또한 그런 공부를 한 적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공부했던 것은 공인중개사의 시험공부였다.



 하루는 독서실에 있기도 했고, 도서관에 있었던 적도 많았다.

 비교적 도서관을 선호했는데, 그곳에서는 식사도 저렴하게 할 수 있었고, 산에 있다 보니 바깥에 나오면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어서 기분전환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는 하루는 카페에서 몇 시간을 공부하기도 했다.

 사실 도서관에서 싼 값에 식사를 먹다 보니 아메리카노 3000원이 터무니없이 비싸 보였다.

 나는 그 가격에 도서관에서 돈가스를 사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아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은 생각 이외로 괜찮았다.



 '기본적으로' 카페는 공부를 하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카페는 지인끼리 모이거나 개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손님이 공통으로 쓰는 장소인 만큼 너무 시끄러운 건 민폐지만, 수다를 떠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개인적인 자유로 허용되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누군가와 담소를 나누고, 커피나 디저트를 즐기는 공간이, 공부를 하는 사람 때문에 조용히 해야 한다는 건 잘못된 거다.

 각자의 시간으로 카페에서 공간을 공유하며 즐기는 곳인데, 공부하기 위해서 조용히 해달라는 건,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게 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불만이 있다면, 정말 테이크 아웃을 해서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게 맞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끄러운 공간에서 공부를 하는 게 좋았다.

 그냥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백색소음이라고 하는 거였다.

 정말 시끄러운 웃음소리는 물론 듣기 싫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린다는 게 꽤나 기분이 좋았다.

 

 그저 수다 소리가 좋은 게 아니었다.

 시끄러운 게 좋은 게 아니었다.

 내가 느낀 그 백색소음은, 오랫동안 혼자만의 공간에서 책을 보면서 공부를 한 만큼, 다른 사람을 그리워했던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얼굴,

 누군가의 목소리,

 누군가의 손짓.

 

 공부를 하다 보면 책상과 의자, 책과 영상 속의 선생님과 익숙해질뿐, 다른 누군가와의 거리가 멀어졌었다.


 나는 아마 그 허전함을 처음 보는 사람의 목소리라도 카페에서 찾았던 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괜한 시선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음에도 굳이 카페 안에서 몇 시간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그래서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것 만으로 그저 마냥 청승맞다고 안쓰러운 시선을 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수년 전에 그런 광고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젊은 학생이 버스 안에서 자고 있고,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불쾌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학생은 학교를 가랴, 시험공부를 하랴, 아르바이트를 하랴, 터무니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잠시 버스에서 졸고 있었던 겁니다.

 만약에 그 학생의 사정을 알았다면, 설령 자리를 비켜준다고 한들, 냉큼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까요.

 적어도 불쾌한 시선은 주지 않았을 거 에요.



 또 다른 이야기로는,

 자신의 상황이나 처지를 위로하기 위해서 남을 낮추게 본다거나, 더 어려운 상황의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높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그래도 쟤 보다는 낫지."

 그건 솔직히 조금 무례한 사고방식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속사정을 잘 들여다보지도 않고 판단하고 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분명 바른 행동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동은 그렇게, 전부 '이유'가 따릅니다.

 그렇기에 열정적으로 움직이기도 하며,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기도 하고, 반대로 놓치고 싶지 않던 것을 그냥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하는 이유도 있겠죠.


 그런 모습은 타인에게서,

 주변을 둘러보면, 처음 보는 타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것만 봐도,

"독서실이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면 되지 뭐 하러 시끄러운 곳에서 저러고 있담?"

 그렇게 편견으로 단정 짓는 게 아닌,

 '일부의 사람들의 이야기'라도 사정을 알 수 있고, 어떤 가능성으로 인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좀 더 입체적으로 생각을 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쌓는데 더 현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편견은 누군가의 관계를 쌓기도 전에 쌓는 벽이기도 하니까요.

 편견을 깨는 것만큼, 관계를 쌓는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 매거진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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