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마지막이 끝나려고 하는 무렵.
주변의 친구들은 결혼을 이미 하거나 결혼 예정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나이다 보니 집에서는 물론,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언제 결혼할 예정인지 묻는 게 일수다.
애초에 결혼할 남자 친구도 없다고 하면, 사람을 소개받아야 하니 어쩌니 잔소리는 더 나아가곤 했다.
제일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애는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있었고, 이젠 나이가 있다 보니 순수하게 연애만 생각하고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은지 망설여질 때가 많았다. 이젠 누군가를 소개를 받는다고 한다면, 소개팅이라고 칭하는 게 아니라 맞선이라고 칭하고 만나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정말 미래에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릴 생각이 있다고 한다면, 마냥 그 순간만 즐길 생각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대학생들 커플이 보이면 부러워지기도 했다.
그때는 분명 학업도 학업이지만, 애인이나 친구들이나 같이 놀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으며, 풋풋하게 감정을 교차할 수 있는 가장 절정의 시기이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의 나처럼 상대방이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는지,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지,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던 그때에는 너무나도 다른 감정을 지닌 시기다. 아마 이제는 더 이상 그저 순수하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보수적이게 된 건지, 결혼은 현실이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의 톡이 도착했다.
상대방은 내가 맞는지 확인하려 했으며, 수긍한 나는 상대방에 대해서 기억나기 시작했다.
"진짜 오랜만이지? 나 지금 다른 애들한테도 연락 돌리고 있어."
그녀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였다.
오랜만에 옛날 친구가 연락을 주어서 반갑기도 했었지만, 괜히 난데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웬일이야?"
"아니, 이제 우리들 내년이면 30대잖아. 그전에 초등학교 동창회 한 번 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돌아서. 이렇게 한 명씩 모으고 있지."
"초등학교 동창회라니. 누가 주도하고 있는 건데?"
"물론 나지? 그러니까 이렇게 연락하잖아?"
"누구한테 내 연락처 들었어?"
"너, 너무 뭐 물어보기만 하는 거 아냐? 나는 그래도 반가워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
"..."
뭔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에 조금 당황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만큼 요즘의 나도 좀 민감해진 것 같기도 했다.
"미안, 요새 좀 컨디션이 안 좋다 보니."
"일이 힘들어서 그래?"
"아니 좀. 그냥 그래."
나는 그렇게 얼버무렸고, 친구도 따라주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전교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총합 6학년까지의 전교생의 숫자는 300명이 되지 않았고, 각 반에 또한 20명에 두 반씩 있었다. 내가 6학년이 될 때에는 다른 친구들이 전학을 가는 경우가 잦아져서 아예 한 반으로 통합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가 적었고 6년을 계속 학교를 같이 다닌 것과 다름없기에, 우리들에게서의 동창회는 대학교의 같은 학번 모임처럼 소규모였다. 서로 모르는 사람도 없을 정도고 그 정도로 규모가 작으니, 오히려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었던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는 연락하는 끝자락에서 이렇게 물었다.
"누가 연락처 알려줬는지 궁금해?"
"어? 그래. 누가 알려줬어? 그리 많지 않은데."
나의 전화번호는 15년이 넘도록 같은 번호를 쓰고 있긴 했지만, 고등학생 때 처음 휴대폰이 생겼었고 그 전에는 PC 메신저를 더 활용했었기에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친구는 말했다.
"미리 말해주면 안 올지도 모르니까. 동창회 오면 말해줄게."
"뭐? 왜? 내가 알면 안 갈까 봐 그래?"
"딱히 그런 거 아닌데. 여자애들은 결혼한 애들도 있어서 못 오는 경우가 있다 보니까. 꼭 왔으면 해서 하는 말이지."
"꼭 갈 테니까 지금 말해줘."
그리고 상당히 뜸을 들이던 그녀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을 듣고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뭐? 진짜로? 지금 장난치는 거지?"
"장난은 무슨.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알려줬어."
"장난치는 거 아냐? 그때는 너네들 다 알고 있었잖아."
"뭐 장난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진짜야. 근데 걔는 아마 못 올 것 같기도 하더라. 그러니 그리 신경 쓰지 마."
그 사람은,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고, 아주 오랜 시간을 좋아했던 남자였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좋아했음에도 먼저 연락을 끊은 남자이기도 했다.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 동창회를 하는데, 걔는 당연히 와야 하는 거 아냐?"
"그렇지? 초등학교라고 해도 학생회장이었는데 말이야."
우리들에겐 그런 위치의 동창생이기도 했다.
이상형이란 딱히 존재하진 않았다.
주변 친구들은 아이돌이나 가수들을 보고 멋지고 잘생긴 사람들을 보면 우러러보았고, 무언가의 특기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곤 했다.
그리고 아무리 어린다고 한들, 누군가가 좋아해 지는 감정이 생기고 있을 때쯤, 우리 여자애들끼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야, 너는 우리 반 남자애들 중에서 누가 좋아?"
그건 누군가를 좋아해야 한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에 대해 정확하게 답해줄 수 없는 애들은 그저 인기 있는 남자애의 이름을 꺼낼 뿐이었다. 어차피 인기 있는 애니까 인기 받아도 상관없던 거였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그 애의 이름을 꺼냈다.
내가 처음 좋아했던 그 아이는 그렇게 튀는 애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해가 바뀔수록 그 애도 바뀌어갔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운동을 배우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에는 육상계에서 눈여겨 보이기도 하고 대회 출전 선발에 나가기도 했다. 후에는 수학경시대회에 매번 나가서 상을 받아오기도 했으며, 미술을 배우더니 어느 날에는 피아노 학원에도 가는 모습도 보였다. 마지막 6학년이 되었던 해에는 국악기를 다루기도 했고, 주변에서는 학생회장으로 밀어주려고 했고 학교 특혜로 여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경험을 주기도 했다.
나는 그가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이전부터 좋아했다.
하지만 그 애의 그런 특기와는 상관없이 좋아했던 나의 마음에 비해, 다른 애들도 그 순간의 그 애의 모습을 보고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싫었다.
그건 어째, 나만 알고 있었던 보물지도 같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게 불안감으로 받아들여졌다.
처음으로 감정에 대해서 손해 받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떠올렸다.
"뭐? 진짜? 걔가 왜 좋아?"
그때 내 대답에 친구들은 놀란 모양이었다. 정확하겐 좀 신선해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때는 그렇게나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말했다.
"웃는 모습이 좋아."
분명히, 나는 진짜로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때 그런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이불을 발로 찼다.
베개로는 내 얼굴을 눌러댔고, 까마득히 어린 녀석이 무슨 그런 닭살 돋는 말을 했을까,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웃기기도 했다.
이제 막 10살 된 애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뭘 안다고 좋으니 마니 그런 소리를 했을지.
하지만 그건 확실했다.
그 애가 어떻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
그저 완전히 사랑에 빠진다면, 그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좋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좋아지는 건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 사람이 가져서 좋아하게 되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던 것은 똑같았다.
나는 그게 사랑의 순수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이유도 계기도 없이 좋아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나는 이불속에서 SNS를 통해서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없을까 했지만, 이미 내쪽에서 연락이 끊긴지는 오래되었다. 제일 최근에 연락을 하고 남았던 것은 페이스북 메신저에서 주고받았던 것이 있었는데 그 마지막 날짜는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의 것이었다. 더 이상 그가 페이스북도 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먼저 연락을 끊은 건 나였다.
그 애는 어떻지 모르겠지만, 제일 연락을 많이 주고받은 것은 걔였고, 제일 많이 생각한 사람도 그 애였다.
그리고 그렇게 짝사랑 또한 5년을 질질 끌어가기도 했다.
사실 더 긴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나에게로선 짝사랑이란, 내 멋대로 혼자 숨겨오는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을 알고도 받아주지 않았던 그 순간들을 짝사랑이라고 여겨왔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 애를 포기하고, 너 말고 다른 사람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준답시고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
결국엔 그 연애나 나의 첫 연애였다.
반항심이라고 할까, 복수심이라고 할까, 그런 마음이 좀 섞여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나를 좋아해 주는 마음에 영향을 받지 못할 건 아니었다. 그가 나를 좋아해 준 만큼 그동안의 짝사랑이 한없이 무참해질 정도로 나도 좋아하곤 했다.
그 후에는 두 번의 연애를 더 했다.
한 번은 내가 사회에 나가기 시작했을 때, 상대는 대학생이었던 연하남이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너무 음란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노골적으로 나와 성관계를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드러났었다. 그건 마치 그런 목적으로 나를 만나려는 게 아닐지 생각하게 만들 정도이기도 했다.
그다음에는 외로워하고 있던 나에게 직장선배가 소개해준 5살 연상의 남자였다. 그는 이미 30대에 접어들어 있었고, 직장에서는 물론 여러 가지로 안정적인 편이었기에 부담 없이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해 주었던 게 기억이 남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그저, 사랑하기에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정도로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어 본 적이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려운 말인가 싶었지만, 그저 아주 명료하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그거다.
그저 순수하게, '아무런 이유도 계기도 없이 좋아한다는 것'이 없었다.
물론 운명적인 사랑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 나의 연애에는 이유가 있어야 사랑할 수 있었던 그런 느낌이었다.
첫 연애에는 나에게 첫사랑을 포기하고 남은 상처를 치유받길 바랐고.
두 번째에는 내 입장을 더 고려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제일 컸고.
세 번째에선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길 바랐다.
그 역할을 해 줄 사람이 나타나듯,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왔다. 아무리 보수적인 면이 녹아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을 그 순간에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 그 어릴 적, 그 애를 좋아할 때 빼고 말이다.
물론 내가 받은 사랑은 없었지만.
그렇게 바랐지만, 정작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사람들에게 잘해준 게 있었을지 되새겨 볼 때도 있었다.
그는 나에게 정말 풋풋한 사랑을 주었지만, 난 더없는 사랑을 주지 않았고,
그는 나와의 몸 관계를 바랐지만, 나는 칼같이 그어버렸고
그는 나의 외로움을 지워주었지만,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여자였고, 보수적인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이기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여자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받은 게 있으니 반드시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게 무조건 적인 건 아니겠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나의 바람만 바라고 있었다. 양보를 해 줄 수 있는 것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작 그들의 입장에서 나는 그저 이기적인 여자라고 보일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오늘 밤은 어째, 더 외롭다고 느껴졌다.
그건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내 옆에 있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말 그 연락처의 출처를 알게 된 것 때문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시간은 벌써 새벽 3시였다.
잠은 계속 더 오지 않았고, 그가 왜 아직도 내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귀찮아서? 그냥 정리를 안 한 것뿐인가?"
하지만 걔가 먼저 알려줬다면서?
알려줘 놓고 못 온다고 그랬다고?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지 맘대로인 건 나이 먹어도 다를 게 없네!
나는 그런 말을 속으로 한 건지 실제로 말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의 그 애는 왜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던 걸까?
그렇게 싫었던 걸까?
그렇다면 왜 질질 끌지 않고 똑바로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
그는 과연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어떤 사랑을 해왔는지,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지, 나처럼 이러고 있는 건 아닌 건지.
나는 사실 그렇게 그를 미워하곤 했다.
만약 그때 그가 내 마음을 받아주고 서로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원했던 사랑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을까?
어째....
무언가의 해답을 바라고 있었다.
그건 그에게 달렸다고 느껴졌다.
그가 보고 싶어 지기도 했다.
"동창회... 왔으면 좋겠다."
결국 나는 다음날 친구의 도움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