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는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를 제작한 후 네 점의 노예를 더 제작하다가 미완성으로 남겼다. 이들은 1520년에서 1530년 사이에 제작된 것들로 현재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므로 “아카데미아 노예”라고 부른다. 이 작품들에 붙여진 제목은 <큰 덩이 머리 노예>, <젊은 노예>, <잠에서 깨어나는 노예>, <수염 난 노예>이다. 이 작품은 율리우스 무덤의 조각상 중 일부로 추측되는데 1519년 로마의 레오나르도 셀라이오의 편지에 따르면 미켈란젤로가 그해 여름 무덤의 조각상 네 점을 조각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코포 살비아티가 아기넨시스 추기경에게 말했다고 한다.
<반항하는 노예>를 제작할 때 돌의 결함과 충분하지 못한 부피로 인해 원하는 형상을 표현하지 못한 경험이 있던 미켈란젤로는 네 점의 노예를 더 제작하면서 이번에는 필요한 것보다 더 두꺼운 대리석을 주문했다. 부피가 부족해서 표현을 생략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재료를 넉넉하게 준비한 것이다. <큰 덩이 머리 노예>의 경우 대리석이 그가 제작하려는 형상보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네 점의 노예를 공들여 제작하기 시작했다.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를 제작한 후라서 자신이 원하는 표현을 나타낼 수 있었으므로 충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작은 것이 260cm이고 큰 것이 278cm인 것으로 봐서 그가 실제 사람의 크기보다 훨씬 큰 조각으로 제작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미켈란젤로의 조각 제작 방식이 변했다는 점이다. 바사리와 벤베누토 첼리니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늘 얼굴의 주요 형태를 먼저 조각하고 나서 아래로 조금씩 조각해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미완성의 <노예>들은 튀어나온 부분부터 깎기 시작해서 특별히 감정을 실은 몸통의 근육 모양에 집중했으며 얼굴은 한꺼번에 드러나게 조각했다. 그러나 1534년 피렌체를 떠나게 되면서 작업을 중단했고 이후 다시 손을 대지 못했다. 이 작품들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도 그의 피렌체 작업장에 남아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노예>를 보면 균형이 잡히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오른쪽 다리는 들려져 접힌 채 왼쪽 무릎 위에 올려져 있다. 몸무게의 중심을 왼쪽 다리로 잡아야 할 텐데 오른팔과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왼쪽 다리로서는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 보인다. 그가 또 다른 요소로 무게를 지탱하게 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상태로는 세울 수 없는 조각으로 보인다. 조각을 완성시켜 세우기보다는 릴리프처럼 현재의 상태로 남겨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부분들은 거친 상태로 남겨두었으면서 몸통은 매끈하게 연마한 점이다. 어쩌면 그는 다듬지 않은 부분과 다듬은 부분의 심한 대조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젊은 노예>와 <수염난 노예>는 네 점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지만 르네상스 취향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미완성이다. 미켈란젤로는 미완성이 주는 표현의 가능성을 개발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조금 덜 묘사함으로써 더욱 표현적이 되고, 명료한 묘사보다 불분명한 묘사가 오히려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