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사사로움보다 백년대계를 세워라.

<최후의 승자가 되라>

by 더굿북

유방은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를 손에 넣었음에도 이내 논공행상(論功行賞)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반란의 조짐마저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상을 내리는 자와 상을 받는 자 사이에 공에 대한 평가에는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 ‘갭(Gap)’이 크면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이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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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이 터지기 전에 다독여라.

조선조 인조반정 때 그런 일이 있었다. 반정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이괄(李适)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든 이른바 ‘이괄의 난’이 그렇다. 당시 논공행상의 주도권 다툼에서 밀린 이괄은 인조가 즉위한 지 열 달 만에 반란을 일으켜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진군했다. 원래 인조반정은 궁정 쿠데타 형식으로 일어난 까닭에 백성들에게는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괄이 이끄는 반란군이 임진강 나루터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파죽지세로 서울로 향하자 인조와 서인 정권은 황망히 공주로 피난을 갔다. 피난을 떠나기 직전, 서인들은 갇혀 있던 전 영의정 기자헌을 포함한 정치범 49명을 밤사이에 몰살했다.

이괄은 반란을 일으킨 지 19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새 왕으로 옹립했다. 이때 광해군의 몰락 이후 숨을 죽이고 있던 북인의 잔여 세력이 다시 발호(跋扈)할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전열을 정비한 관군이 서울로 북상해 올라오자 반군이 크게 패해 경기도 이천으로 도주하면서 사실상 상황이 끝나고 말았다. 이때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가 인조가 ‘친명사대’를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이것이 바로 1627년에 빚어진 정묘호란(丁卯胡亂)의 한 원인이 되었다.

유방이 새 왕조인 한나라를 세우고 평민 출신 최초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도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커다란 물의가 빚어졌다. 「유후세가」에 따르면 한 6년인 기원전 202년 정월, 논공행상하여 공신들을 대거 제후에 봉했다. 장량은 일찍이 드러내놓고 말할만한 전공(戰功)이 없었다. 그러나 유방은 오히려 이같이 말했다.

“군영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 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모두 장량의 공이다. 제나라 영토 안에서 3만 호를 직접 고르도록 하라.”
장량이 사양했다.
“신은 애초 하비에서 일어난 뒤 폐하를 유 땅에서 만났습니다. 이는 하늘이 신을 폐하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폐하는 신의 계책을 썼고, 요행히도 그 계책이 맞아떨어졌습니다. 신은 유후에 봉해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3만 호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고조 유방이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유방은 장량을 비롯해 소하와 진평 등 큰 공을 세운 공신 20여 명을 우선 제후에 봉했으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밤낮으로 서로 공을 다툰 까닭에 결론이 나지 않은 탓이다.


원수진 이의 공을 가장 먼저 치하하라.

하루는 유방이 낙양의 남궁에 있을 때 구름다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러 장수가 모래밭에 모여앉아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유방이 궁금한 나머지 장량에게 물었다.

“저들이 저기서 무슨 말들을 하는 것이오”
장량이 대답했다.
“폐하는 모르고 있습니까? 이는 모반하려는 것입니다.”
유방이 매우 놀라 물었다.
“천하가 막 안정됐는데 무슨 까닭으로 모반하려는 것이오”
장량이 대답했다.
“폐하는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일어난 뒤 저들에게 의지해 천하를 차지했습니다. 이제 폐하가 천자가 되어 봉한 자들 모두 폐하가 친애하는 소하나 조참 같은 옛 친구들이고, 죽인 자들은 모두 평소에 원한이 있던 자들입니다. 지금 군리(軍吏)가 따져보니 천하의 땅을 다 가지고도 전공을 세운 자들을 모두 봉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저들은 폐하가 모두 봉해 주지 않을까 두렵고, 또 평소의 잘못을 의심받아 죽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모여 모반하려는 것입니다.”

유방이 청했다.
“어찌하면 좋겠소?”
장량이 반문했다.
“황상이 평소 미워하면서도 신하들이 모두 아는 자 가운데 가장 심한 자가 누구입니까?”
유방이 대답했다.
“옹치(雍齒)과 짐 사이에 구원(舊怨)이 있소. 일찍이 짐을 여러 차례 곤욕스럽게 만들어 죽이고자 했소. 하나 그의 공이 많은 까닭에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장량이 말했다.
“지금 급히 옹치를 봉하는 모습을 신하들에게 내보이십시오. 옹치가 봉해지는 것을 보면 이들은 자신들도 봉해질 것을 굳게 믿을 것입니다.”

유방이 곧 술자리를 베풀고 옹치를 십방후에 봉했다. 이어 급히 승상과 어사(御史)를 재촉해 아직 논공행상이 이뤄지지 않은 자들의 공을 정한 뒤 각지에 봉했다. 신하들 모두 주연이 끝나자 기뻐했다.
“옹치도 후에 봉해졌으니 우리는 걱정할 일이 없다.”
이내 논공행상을 둘러싼 잡음이 잦아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직도 자신을 배신한 옹치에 대한 원망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옹치를 과감히 제후에 봉한 덕이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백년대계를 보라.
연소왕은 특별히 곽외를 위해 궁궐을 지어주었다. 자신은 제자의 예를 다해 곽외의 가르침을 듣고, 친히 음식을 대접하는 등 지성으로 모셨다. 또 지금의 하북성 역현 경내에 있는 역수 가에 높은 누대를 지은 뒤 누대 위에 황금을 쌓아두고 사방의 현사를 초청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 누대를 초현대 또는 황금대로 불렀다.

이내 연소왕이 선비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천하에 널리 퍼졌다. 수많은 인재가 연나라로 모여들었다. 연소왕이 이들에게 객경(客卿)의 벼슬을 주고 함께 함께 국사를 상의했다. 문득 부강해진 연나라는 이내 제나라에 복수를 가할 수 있게 됐다. 훗날 원세조(元世祖) 쿠빌라이 당시의 문인 유인(劉因)은 지금의 북경인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가 전국시대 당시 연나라의 수도였던 점에 주목해 「황금대시(黃金臺詩)」를 지었다.

연산은 산색을 바꾸지 않고 (燕山不改色)
역수는 소리 없이 흘러가지 (易水無剩聲)
누가 알까, 저 황금대 위에 (誰知數尺臺)
만고의 인정이 서려 있음을 (中有萬古情)

연소왕이 황금대를 지어 천하의 인재를 초빙함으로써 마침내 제나라에 복수하고,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을 칭송한 시이다. 연소왕이 보여준 일련의 행보는 유방이 건국 초기 옹치를 선뜻 제후에 봉함으로써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불온한 모습까지 보인 공신들의 불만을 일거에 잠재운 것과 취지를 같이한다. 병법에서 역설하는 ‘출기불의’ 계책을 연소왕은 득인에, 유방은 용인(用人)의 일환인 인사정책에 활용한 셈이다.

비록 계책은 장량이 내기는 했지만 이를 받아들인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이 유방 자신이다. 갓 출범한 한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사원(私怨)을 버리고 과감히 옹치를 제후에 봉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황제를 칭한 중국의 역대 왕조 가운데 한나라가 가장 긴 400년의 역사를 이어간 데에는 유방이 개국 초기 장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신들의 불온한 기운을 슬기롭게 잠재운 것이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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