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승자가 되라>
천하를 호령한 뒤에도 죽순 껍질로 만든 관을 쓰다.
유방이 정장으로 있을 때까지 설현에는 유협을 크게 대우한 맹상군의 행보를 기리는 유풍(遺風)이 남아 있었다. 정장으로 있던 유방이 자신의 휘하를 설현으로 보내 관을 만들도록 한 것은 당시 죽순 껍질로 만든 죽피관(竹皮冠)이 크게 유행했음을 암시한다. 유방은 이를 크게 유행시킨 장본인이었다. 「고조본기」에는 천자가 된 뒤에도 이를 계속 쓰고 다니는 바람에 후대인들이 기존의 ‘죽피관’을 ‘유씨관’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대략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첫째, 기존의 죽피관이 매우 멋스러웠던 까닭에 유방 스스로 이를 상용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방의 ‘건달’ 기질이 적극적으로 발현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죽피관을 두고 배인의 『사기집해』는 전한 때 나온 응소(應劭)의 『풍속통의(風俗通義)』를 인용해 죽피관이 마치 까치 꼬리를 닮아 속칭 작미관(鵲尾冠)으로도 불렸다고 풀이해 놓았다. 당나라 때 나온 사마정의 『사기색은』 역시 응소의 주를 인용해 죽피관이 매우 길었던 까닭에 일명 장관(長冠)으로 불렸다고 했다.
일본의 미술사학자 소부카와 히로시는 『세계미술대전집-동양편』을 비롯한 일련의 저서를 통해 마왕퇴 1호분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마용(馬俑)이 쓴 관이 바로 죽피관 ‘유씨관’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 관은 머리 위에 끝이 올라가는 널빤지 같은 것이 얹혀 있는 매우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가 7촌, 넓이가 3촌이다. 유방은 죽피관이 매우 화려하고 멋스럽게 보인 까닭에 정장으로 있을 때부터 이를 탐내 휘하를 보내 그 제작 기법을 배우게 했을 것이다. 지방의 일개 아전이 독자적으로 멋들어진 관을 상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유방이 평소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의 기호를 천하제일의 유행으로 만든 뒤 많은 사람에게 이를 허용해, 갓 출범한 한나라의 건국 기반을 다지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천자가 된 뒤에도 정장 때부터 늘 착용한 죽피관을 계속 썼다는 「고조본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천자가 된 뒤에도 계속 ‘유씨관’을 썼다면 항우에 의해 한왕에 봉해졌을 때도 틀림없이 이를 썼다고 보아야 한다. 한왕은 제후에 불과했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지존무상의 천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이를 계속 쓰고 다닌 속셈은 무엇일까?
천자의 자리에 올라서도 변하지 마라.
유방은 황제가 된 뒤 조칙을 내려 작위가 공승 이상이 아니면 ‘유씨관’을 쓰지 못하게 했다. ‘유씨관’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인 공승은 유방이 처음으로 벼슬을 지낸 정장 수준의 하급 관원에 지나지 않는다. 군대로 치면 하사관 정도 수준이다. 정장 밑의 소졸 정도를 제외하고는 관원의 이름을 단 사람은 거의 모두 ‘유씨관’을 쓸 수 있었던 셈이다. 거의 모든 관원이 천자가 쓰고 다니는 ‘유씨관’을 합법적으로 착용할 수 있었던 셈이다. 진시황이 조서를 내려 1인칭 보통명사에 지나지 않았던 ‘짐(朕)’이라는 용어를 오직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수 용어로 제한한 것과 대비된다. 관인(寬仁)하다는 세평을 듣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진시황과 대비시켜 갓 출범한 신생 제국인 한나라의 건국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자 한 것이다.
「고조본기」에 ‘유씨관’에 관한 기사가 유방이 젊었을 때 이미 황제의 기상을 보였다는 기사 다음에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방이 나중에 황제가 된 뒤에도 젊었을 때의 기본자세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은연중 강조하려는 의도가 짙다. 젊었을 때 이미 황제의 기상을 보였다는 기사에 따르면 정장으로 있을 때 유방이 하루는 휴가를 내고 시골집에 돌아온 적이 있다. 마침 유방의 정실 부인 여치가 두 아이를 데리고 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지나가던 노인이 마실 물을 청하자 여치가 먹을 것도 내주었다. 노인이 여치의 관상을 보고 말했다.
“부인은 천하의 귀인이 될 것입니다.”
여치가 매우 놀라 두 아이의 관상까지 보게 했다. 노인이 훗날 한 혜제로 즉위하는 유영(劉盈)을 보고는 이같이 말했다.
“부인이 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아이 때문입니다.”
다시 노원 공주의 상을 보고 역시 모두 귀상(貴相)이라고 했다. 노인이 떠난 뒤 마침 유방이 이웃집 방사(旁舍)에서 나왔다. 여치가 유방에게 지나가던 길손이 자신과 아이들의 관상을 보고 귀상이라고 말한 사실을 소상히 전했다. 유방이 그 노인이 어디로 갔는지 묻자 여치가 대답했다.
“멀리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방이 노인의 뒤를 쫓아가 관상을 물었다. 노인이 대답했다.
“조금 전에 부인과 아이들의 관상을 보았는데 모두 당신의 상을 닮았습니다. 당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귀상입니다.”
고조가 크게 기뻐했다.
“실로 노인장의 말씀대로라면 그 은덕을 잊지 않겠소.”
훗날 유방은 천자가 된 뒤 노인을 찾았으나 결국 그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유방과 여치를 비롯해 그의 소생들의 관상에 관한 얘기는 여기까지가 전부다.
이 얘기 뒤에 바로 ‘유씨관’ 일화가 나온다. 사마천이 「고조본기」의 앞 대목에 문득 유방이 정장으로 있을 때 이미 천자의 관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얘기와 함께 ‘유씨관’ 일화를 실어 놓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황제가 된 뒤에도 자신에게 은덕을 베푼 사람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기호를 소리와 공유하려는 관대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이는 그래야만 천자가 될만한 자격이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라.
이에 따르면 춘추시대 당시 춘추 5패 가운데 제환공에 이어 사상 두 번째로 패업(霸業)을 이룬 진문공 중이(重耳)는 장인인 진목공의 무력지원 덕분에 19년간에 걸친 망명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귀국했다. 실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중이 일행은 그간 열국을 방랑하면서 고픈 배를 움켜쥐고 굶주림을 견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껴 입을 옷도 없고, 아껴 먹을 밥도 없는 처량한 처지를 수도 없이 겪었다.
그런 숱한 고생을 겪었던 중이 일행이 이젠 고국으로 가기 위해 황하를 건너게 됐다. 중이 일행의 살림을 맡은 행리 호숙(壺叔)이 모든 행리를 수습하면서 전날 고생할 때 쓰던 깨진 밥그릇과 부서진 대소쿠리, 해진 돗자리, 찢어진 볕가리개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일일이 묶어 배에 실었다. 먹다 남은 술과 건포 조각 나부랭이도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아까워하면서 상자에 담아 배 안으로 갖고 들어왔다. 중이가 이를 보고는 가가대소(呵呵大笑)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 고국에 돌아가 군주가 되면 온갖 별미와 좋은 술을 먹을 터인데 저런 다 떨어지고 해진 물건과 먹다 남은 음식 나부랭이를 갖고 가서 무엇에 쓰려는 것인가?”
그러고는 그것들을 모두 강기슭에 버리고 배 안으로 갖고 들어오지 말라고 큰 소리로 지시했다. 이를 본 중이의 외숙인 호언(狐偃)이 몰래 탄식했다.
“공자가 아직 부귀를 얻기도 전에 빈천했던 지난날을 잊으려 한다. 그는 앞으로도 새것을 사랑하고 헌것을 버릴 것이다. 지금까지 함께 고생해 온 우리를 저 깨지고 해진 기물(棄物)처럼 하찮게 볼 것이 아닌가? 내가 19년 동안 공자와 함께한 지난날을 헛되게 할 수는 없다. 아직 황하를 건너기 전인 지금 공자와 작별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러면 훗날 서로 잊지 않고 생각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호언은 중이 앞에 꿇어앉아 진목공이 선물로 건네준 백벽 한 쌍을 꺼내 바치면서 말했다.
“공자는 이제 황하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강을 건너면 바로 진나라 지경입니다. 국내에는 공자를 기다리는 많은 신하가 있고, 밖으론 진나라 장수와 군대가 공자를 돕고 있습니다. 진나라를 얻지 못하실까 염려할 필요는 없게 됐습니다. 이제 이 한 몸이 공자를 모시더라도 더는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은 이곳 진나라에 남아 공자의 외신(外臣)이 되는 게 마지막 소원입니다. 신이 선물 받은 백벽 한 쌍을 바쳐 신의 작은 충정이나마 표하고자 합니다.”
공자 중이가 매우 놀라 외쳤다.
“내가 앞으로 외숙과 함께 부귀를 누리려고 하는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호언이 대답했다.
“신은 지금까지 공자에게 세 가지 죄를 지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감히 공자를 더 모실 수 없습니다.”
중이가 물었다.
“세 가지 죄라니 그게 무엇이오?”
호언이 대답했다.
“신이 듣건대, ‘성신(聖臣)은 능히 그 군주를 높이고, 현신(賢臣)은 능히 그 군주를 편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신은 불초하여 지난날 오록 땅에서 공자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첫 번째 죄입니다. 또 조나라와 위나라에서 공자에게 그 나라 군주의 모멸을 받게 했습니다. 이게 두 번째 죄입니다. 이어 술에 취한 공자를 수레에 태우고 제나라를 빠져나와 공자를 진노하게 했습니다. 이게 세 번째 죄입니다. 지난날엔 공자가 망명길에 나선 떠돌이 신세인 까닭에 신이 차마 공자를 버리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공자가 고국으로 당당히 쳐들어가는 마당이니 그때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신도 오랜 세월 동안 분주히 돌아다닌 까닭에 온갖 일을 겪는 과정에서 놀란 혼이 거의 꺼질 듯하고, 심력(心力) 또한 크게 마모되었습니다. 비유하면 신은 마치 찌그러지고 깨진 제기(祭器)인 이른바 여변잔두(餘籩殘豆)와 같아 다시는 제사상에 올릴 수 없습니다. 또한, 찢어진 볕가리개와 해진 돗자리인 폐유파석(敝帷破席)과 같아 다시는 치거나 펼 수 없습니다. 신이 공자 곁에 남아 있다고 해서 이익이 될 것도 없고, 떠난다고 해서 손해될 것도 없습니다. 신이 이제 공자 곁을 떠나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중이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외숙이 나를 책망하는 게 당연하오.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시오.”
그러고는 호숙에게 명해 방금 내다 버린 낡은 물건을 일일이 도로 배에 싣도록 했다. 이어 황하를 향해 맹세했다.
“내가 고국으로 돌아가 구씨의 지난날 노고를 잊고 함께 동심 협력해 정사를 다루지 않으면 내 자손이 번성하지 못할 것이다.”
이어 호언이 바친 백벽을 황하에 던지면서 다시 다짐했다.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이여, 이 맹세의 증인이 돼 주십시오!”
그때 개자추(介子推)는 다른 배를 타고 있었다. 그는 중이가 호언에 맹세하는 광경을 보았다. 씁쓸히 웃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공자가 고국에 돌아가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다. 호언은 하늘의 뜻을 가로채 자신의 공으로 생각하고 있다. 부귀를 탐하는 무리와 내가 같은 조정에서 어울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때부터 개자추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은둔할 생각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