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위의 오늘>
국민국가가 현존하고 상대방의 야만적이고 엽기적 판단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현실에서 군대는 불가피하다. 평화주의자의 신념은 모병제가 아니더라도 대체복무제의 도입으로 지켜질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 의무복무 기간에 집총거부의 아름다운 신념을 지키며 선행을 베풀 수 있는 영역은 많다.
나도 시장의 진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시장이 존재해야 할 곳은 적지 않다. 마르크스는 궁극적으로 시장의 완전한 철폐를 대안으로 삼았지만, 그것이 가능하며 바람직한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다. 협잡과 공모와 같은 전근대적인 ‘사회적 자본’의 혁파에 이바지한다는 점에서도 시장은 진보적이다.
그렇더라도 시장이 침투하지 말아야 할 곳도 많다. 부모 자식 사이에 시장이 개입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청춘의 사랑이 맺어지는 곳에 시장이 개입되면 그 사랑은 타락한다. 업자들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결혼정보회사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대리 줄서기, 대리 출석 방식으로 시민의 질서영역에 시장이 들어서면 시민 정신과 공공선은 훼손된다.
진실이 돈으로 사고 팔리는 법률시장은 정의를 질식시킨다. 죗값을 돈으로 치르는 ‘보석금제도’를 나는 가장 불의한 제도로 본다. 돈 있고 잘나고 힘 있는 자들의 죄는 용서받고 가난하고 못나 힘없는 자들 이 죄를 뒤집어쓰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그리고 가장 비열하며 정신 나간 ‘전관예우’는 나의 억장을 무너지게 한다. 진보주의자들에게 경고 하고 싶다. 이 경우 시장은 절대 진보적이지 않다. 시장은 ‘좋은 것’을 훼손하거나 타락시킨다.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에서 한편으로 병역은 경제적으로 가치 있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 국토가 방위 되지 않으면 안전한 경제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베블런은 약탈이 자행되는 시대 즉, ‘야만적 약탈시대’가 종료되고 국민국가에 의해 어느 정도 평화가 정착되자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병역활동은 냉혹한 현실에서 공공선을 이루어내는 불가피한 수단이다. 반면 병역은 3D 업종보다 훨씬 위험하고 어렵다. 신체의 훼손은 물론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생명의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아무도 그 부담을 지지 않으려 한다. 그 때문에 근대 사회 들어 모두에게 공평하게 부담하도록 의무로 지정됐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권력자나 무권리자나,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모두에게 말이다. 나는 이런 것을 정의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정의를 명쾌하게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것이 정의의 한 측면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이런 정도의 정의나마 있기에 인간은 인간다운 것이며, 인간인 것이 자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것이다. 인류의 양심들이 이 작고 초라한 정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를 기억하자.
모병제, 그것은 병역이 ‘상품’으로 교환되는 체제다. 근대적 시장에서 누가 이 극도로 위험한 상품인 3D 업종을 구매할까? 가난하고 못 나고 힘없는 자들이다. 나는 이런 제도를 결코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것을 진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만일 진보 진영이 모병제를 진보적이라고, 징병제를 보수적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기꺼이 보수의 편에 설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상흔은 이처럼 크다. 시장이 마냥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모병제를 도입하기 전에 병역을 회피하는 힘 있고, 돈 있는 잘난 놈들을 찾아 엄벌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고위공직자와 이들 자녀의 병역 면제 비율이 일반인들보다 각각 33배, 15배가량 높다. 그리고 군대를 인간적, 민주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동시에 대체복무제를 도입해야 한다. 시장의 도입을 막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