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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04. 2017

05. '전시 동원'과 '황민화'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온 민족이 참여한 3·1운동 등으로 일본 식민지 지배의 일보 후퇴가 불가피해짐에 따라, 종래의 ‘헌병경찰 정치’(무단통치)는 친일파 육성을 포함한 ‘문화 통치’로 그 형태를 달리하게 됩니다.

사이토 마코토: 일본 해군대장 출신이며 3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문화 통치는 결국 중단되고 ‘전시 동원 체제’라는 야만적 파시즘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한국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산미 증산 계획(産米増産計画)처럼 경제적인 부분에 그치지 않고, 노동력·병력의 확보로까지 수탈의 범위를 확대시켰습니다. 노동력이 부족한 일본의 탄광, 광산, 군사 시설 등에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한 것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당시 그 수가 10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서울의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비롯해 각지에 2,000군데 이상의 신사를 만들어 일본의 국가신도(国家神道)를 강요하고 천황 숭배를 위한 참배를 강요하는 등 ‘황민화 정책’도 실행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어의 국어 상용, 일본 이름으로의 창씨개명, 색의 장려(色衣奨励)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1936년 관동사령관을 하다 조선총독이 된 육군대장 미나미 지로(南次郎, 뒤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된다)는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 히로히토 일왕의 방문을 구실로 한 소학교에서의 조선어 폐지 등 ‘내선일체(内鮮一体)’라는 구호하에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강덕상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특히 ‘교문은 영문(営門, 병영의 문)’이라면서 소학교에서 일본어 교육을 철저히 실시하고, 여기서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을 일본의 병사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중학생이던 저조차 일본의 필승을 의심하지 않았고, 육군유년학교를 희망했을 정도니까요. 소국민 교육이 무서운 효과를 발휘한 겁니다.”

조선에서는 징병제에 의해 1944년부터 종전까지 40만 명의 청년이 일본의 군인·군속으로서 태평양전쟁에 동원되었고, 그중 2만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또, 일본군의 통제와 감독하에 아시아·태평양 침략지에 ‘위안소’를 만들고, 많은 조선인 여성들로 하여금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위안부’가 되도록 강제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제도의 진실을 정면으로 인정한 고노 담화에서 드러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에 걸맞은 행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연합국에 항복하자, 한국은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어 민족의 독립을 회복한 ‘광복’의 날을 맞습니다. 서울의 거리 곳곳에서 환희에 차 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2014년 9월 23일·10월 1일 자, 야마자와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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