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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04. 2017

03. 비누 전쟁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머리를 감으면서 가사에 혼이 실린 ‘난 괜찮아(I’ll Survive)’를 열창한 다음에는 과일향이 나는 몸 전용 세척제를 피부에 바르고 물로 씻어 때를 없앤다. 그러고는 구아바 농축 에센스로 마무리한다. 이것은 대충 보더라도 현대인의 목욕 방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동기 이후로 대부분의 사람이 사용한 세척제는 약초나 재와 동물 지방으로 만든 비누가 고작이었다. 실제로 고대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비누’란 단어가 켈트인이 머리 염색에 썼던 약초와 동의어였다. 로마인과 그리스인은 태운 재나 동물 지방 대신 기름을 바르고 잠시 후에 긁어내어 때를 제거했다. 올리브유로 만든 단단한 비누는 중세 이슬람 문화권의 발명품이며, 무어인이 지배하던 스페인 카스티야(Castilla)를 통해 유럽의 다른 국가로 전파되었다. 단단한 비누가 카스티야 비누로 불린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비누는 12세기 이래로 줄곧 사치품이었다가 산업화가 진행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이 가능해져 대중적인 상품이 되었다. 

1851년에 열린 런던 세계박람회에는 다양한 비누가 전시되었는데, 특히 살짝 향기가 나는 비누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진기한 상품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가운데는 비소와 납 같은 표백용 화학물질이 함유된 비누도 있었다. 이러한 비누를 쓰면 피부가 석고처럼 하얘져 유령처럼 안색이 창백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람회에서 메달을 받은 피어스 비누(Pears Soap)는 글리세린과 천연기름으로 만들어 자극이 덜했다. 

피어스 비누 포스터

                               

1789년 앤드류 피어스(Andrew Pears)라는 미용사가 설립한 피어스 비누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내가 이 책을 쓰는 동안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런던 세계박람회에 수도 없이 많은 비누가 전시되었다는 사실에서 1851년 당시에 비누 제조업체 간의 경쟁이 상당히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된 것은 1898년에 야자수와 올리브에서 짠 기름을 더한 고급 비누가 (제조 공정상의 실수로 우연히 탄생하여) 출시되면서부터다. 팜올리브 (Palmolive)라는 이름이 붙은 이 비누는 출시 즉시 불티나게 팔렸고, 그러자 비누업체 간의 격렬한 전쟁이 일어났다. 청결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던 빅토리아시대 사람들은 비누업체에는 노다지나 다름없었다.

비누업체는 제품 다변화를 고심하던 끝에 겨드랑이에서 쉴 새 없이 땀이 나는 사람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80년대에는 초기 형태의 데오도란트(deodorant: 겨드랑이 암내 등의 체취 제거제)가 출시되었다. 그러나 이 제품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제안했던 안전 목욕법처럼 땀구멍을 단순히 밀랍으로 막아 냄새를 막는 것에 불과했다. 진정한 데오도란트는 1907년 어느 의사가 염화알루미늄을 원료로 만든 화학제품이었다. 그는 “악취 안 돼!(odour, oh no!)”라는 뜻으로 제품에 ‘오도로노(Odorono)’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수완이 좋은 딸을 시켜 이 제품을 여성들에게 판매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체취를 풍기는 것을 사회적으로 망신살이 뻗치는 일로 광고하여 대중의 두려움을 자극한 데 있었다. 이는 대중의 편집증적인 성향을 마케팅에 최초로 이용한 사례였다. 오도로노의 광고를 실은 잡지에는 심리적인 공갈 협박에 자존심이 상한 여성들의 구독 취소 요청이 쇄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도로노의 판매는 급증했고, 얼마 후에는 비슷한 문구의 다른 특효약 광고가 불안감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노렸다.

오도로노가 1926년에 내놓은 다음의 광고 문구만큼 여성의 가슴을 후벼 판 것은 없었다.

“팔 밑에 반달 모양의 추한 얼룩이 있는 여성이 있을 곳은 없다.”

1934년에는 겨드랑이를 문지르고 있는 여성의 그림과 함께 이러한 광고문구를 게재했다.


“이 여자처럼 되고 싶은 여자는 없다!”

이러한 광고는 벽돌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노골적이었지만 소비자에게 잘 먹혔다.

20세기가 진행될수록 ‘하드셀(hard sell: 제품의 장점을 노골적으로 소비자의 머리에 주입하는 광고 전략으로 경성 소구 방식으로도 불림)’ 전략은 점점 강도를 더해 갔고, 업체 간에는 고객충성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비누 전쟁의 파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미국 텔레비전 연속극을 뜻하는 ‘소프 오페라(soap opera)’였는데, 이는 인기 연속극에 으레 비누 광고가 따라붙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그 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청결뿐 아니라 인위적이고 감각적인 정체성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극적으로 변화한 것도 비누 전쟁이 끼친 영향이었다.

한때 서구인에게서는 땀과 오물 냄새가 났다. 심지어 거만한 프랑스 국왕이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조차 견디기 어려운 악취를 풍겼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손에서 라벤더 내음을, 머리에서 호호바(멕시코 북부의 건조지역에서 자라는 관목)와 야자수 에센스향을 풍긴다. 이제 인간의 몸은 본연의 냄새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림, 각질제거제, 보습제, 데오도란트, 샴푸 등 미용 제품의 광고판이 되어버렸다.

내 아내는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면 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주인공 윌리 웡카가 우연히 열대우림 한가운데에 지었던 초콜릿 공장과 같은 냄새를 풍긴다. 한마디로 피부에서 나는 카카오버터향과 머리에서 나는 감귤류향이 뒤섞인 냄새다. 그 내음을 맡으면 나는 약간 어지러워질 뿐 아니라 격렬한 허기를 느낀다. 몸을 씻고 나서 피부를 온통 달콤한 향이 나는 과일과 식물 추출물로 뒤덮는 현대인의 습관이 야생 침팬지가 악취를 가리려고 몸에 나무열매즙을 바르는 행위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수백만 년이 흘러도 우리 인간은 여전히 본질적으로는 동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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