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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08. 2017

09. 14살 때 강제 동원된 한국의 근로정신대 피해자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올해는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패전(1945) 70주년. 곧 종전의 날(8월 15일)을 맞게 됩니다.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을까요? 한반도에서 여자근로정신대로 일본에 강제 동원되었던 한국 여성과 중국 동북부에 주둔했던 전 일본군 병사의 증언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폭행·욕설을 일삼으며 급료조차 주지 않다.

1929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한반도에서 태어난 양금덕(85)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44년 6월, 여자근로정신대로 일본에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전쟁 수행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채우기 위해 한반도와 중국의 남성을 일본으로 강제 연행해 왔습니다.

전쟁 말기에는 한반도에서 4,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지는 수많은 소녀들을 속여 일본의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14세이던 양 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신대로 일본에서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여학교도 갈 수 있다.”

초등학교의 일본인 교장과 헌병은 달콤한 말로 학생들을 속여 양씨 등 10명을 지명했습니다. 나중에 부모들이 반대한다고 하자, 교장은 “네가 안 가면 경찰이 너희 부친을 잡아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양금덕

                              


그렇게 끌려가게 된 곳은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의 도우도쿠(道徳) 공장이었습니다. 삼엄한 감시하에서 거대한 비행기 부품에 도장 작업을 했습니다. 당시 페인트가 자주 눈에 들어갔던 탓에 지금도 눈이 아프다고 합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화장실에 가려고 줄을 서 있으면 나중에 온 일본인이 “조선인은 더러우니까 뒤로 가라”고 욕설을 퍼붓던 일이었습니다. 결국 참을 수 없어 오줌을 지리는 바람에 작업에 늦게 복귀하여 반장으로부터 따귀를 얻어맞기 일쑤였습니다.

1944년 12월, 도난카이(東南海) 지진에서는 고향 친구 6명을 잃었습니다. 한밤중에 공습이라도 있으면 공포에 휩싸여 필사적으로 달려야 했습니다.

양 씨는 일본이 패전을 맞은 뒤인 1945년 10월에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급료는 받지 못한 상태였고,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받았습니다. 정신대였던 것을 숨긴 채 결혼했는데, 남편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더러운 여자”라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양씨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왔다. 마음이 못에 찔린 것처럼 괴로웠다”며 목이 메었습니다.

나고야에서는 1986년부터 시민들에 의해 정신대 피해자를 찾는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나고야 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 공동 대표인 다카하시 마코토(高橋信, 72)는 말합니다.

생산 증진과 전승을 기원하며 아쓰타신궁(熱田神宮)을 참배한 한반도 출신 여자근로정신대 소녀들(‘나고야 미 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 제공)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이 할머니들의 청춘과 인생을 빼앗고, 전후에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은 채 방치해왔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다.”(원문에도 한국어로 ‘할머니’라고 쓰여 있다–옮긴이)

양 씨는 1999년에 변호사와 시민의 지원을 받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습니다. 고등재판소도 한일청구권협정(1965)에 따라 “개인의 청구권은 재판을 통해 요구할 수 없다”면서 원고 7명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2007).

최고재판소의 상고 기각으로 패소가 확정되었지만(2008), 고등재판소 판결이 인정한 ▷ 정부와 기업의 강제 연행·강제 노동 사실 ▷ 정부와 기업의 불법행위 책임은 확정되었습니다.

양 씨는 “가장 괴롭고도 분한 것은 아베가 진실을 감추는 것”이라며 분노의 눈물을 흘립니다.

한국 대법원은 2012년 최초로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판단을 내놓았습니다. 이를 받아들인 양 씨 등 5명은 한국에서 소송을 제기했고, 지방법원에 이어 올해(2015) 6월 고등법원에서도 승소했습니다.

“다카하시 씨와 그 동료들이 마치 자신의 친자매처럼 피해자를 찾아내주었다. 모든 것이 거기서 시작되었다.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양씨. 그러나 미쓰비시중공업은 포기하지 않고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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