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Oct 16. 2017

03. 임신한 아내를 혼자 내버려 두는 남편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미유키는 아이를 낳고 싶기는 했지만, 날마다 전철이 끊기는 시간까지 야근하는 상황에서 임신은 꿈도 꾸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혼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2년 동안은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2년이 흐른 후 그럭저럭 같이 살 만하다고 확신하면서 산부인과 검진을 받았고, 시판용 배란 테스트기를 구입해서 배란일을 검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아이 갖기에 돌입했다.

이른바 ‘임신 준비 활동’(임신이나 출산에 각별히 신경 쓰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메이지야스다생명(明治安田生命) 생활복지연구소가 2013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20~30대 여성 중 기혼자의 80퍼센트, 미혼자의 60퍼센트가 임신 준비 활동을 했다 (‘제7회 결혼・출산에 관한 조사’)고 한다.

결과적으로 미유키는 34세에 임신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만, 한편으로 남편에 대한 원한은 점점 깊어갔다.

임신한 사실을 알자마자 그녀는 회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거래처와 식사하는 자리도 최대한 피했다.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에서도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라며 술을 거절했다. 임신 초기에는 개인적인 일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저씨들이 흔히 그렇듯, 더구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미유키의 임신 사실을 눈치챌 리 없었다. “술을 마시면 알코올로 소독이 된다니까”라는 틀에 박힌 말로 계속 술을 권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고생깨나 했다. 임신하기 전까지는 호쾌하게 술을 마셨던 터라 참기 힘들었지만 배 속의 아기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또 회사에서는 늘 짧은 치마에 하이힐 차림으로 일했는데, ‘몸을 차게 하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에 정장 바지를 입고 굽이 낮은 구두로 바꿨다.

미유키가 아기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이 남편은 옆에서 태평하게 술이나 마시고 새벽이 다 되어 집에 들어왔다. 그녀는 분노가 솟구치고 배알이 뒤틀렸다.



“나도 회식에 참석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데, 당신 혼자 아무렇지 않게 술 마시러 간단 말이에요!”

미유키가 화를 내면 남편은 어김없이 상투적인 핑계를 늘어놓았다.

“같은 회사에 다니니까 잘 알잖아. 회식도 일의 연장선이니 어쩔 수 없다고. 술자리에 빠져서 좌천이라도 당하면 좋겠어?”

‘아기가 곧 태어날 텐데 그러면 안 되지.’ 그녀는 속으로 ‘비겁한 놈’이라고 곱씹을 수밖에 없었고, 원한은 점점 깊어갔다.

임산부 검진을 받을 때도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건강보험증은 호적상의 이름을 따르기 때문에 남편의 성으로 되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내 이름이 아니야’라는 생각에 우울했다. 결혼 전의 성이 호명되면 자신을 부른 줄 알고 무심코 진료실에 들어가곤 했다. 남편에게 “차라리 사실혼 관계로 지내는 건 어때요?”라고 말하자, “그러면 비적출자(혼인외의 출생자)로 아이만 불쌍하잖아”라는 그럴듯한 변명을 했다.

그녀는 ‘어디 두고 봐. 아이만 태어나면 복수할 거야. 당장 이혼할 테다!’라며 굳게 마음먹었다.

일본의 경우 임신하면 결혼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서 실제로 임신하고 결혼하는 사례가 증가하는 추세다. 반면 사실혼도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부부가 각자의 성을 그대로 쓰고 싶거나 굳이 혼인신고를 할 필요가 있겠냐는 이유로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에 ‘미신고한 남편, 아내’로 등록하면 혼인신고를 한 부부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이 경우에는 세금 외에 사회보험이나 연금을 법률혼과 동등하게 적용받는다. 사실혼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는 비적출자가 되는데, 2013년 일본 대법원에서는 비적출자의 유산 상속분을 적출자(혼인 중의 출생자)의 절반으로 규정하고 있는 민법 조항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래서 2013년 9월 5일 이후의 상속에서는 비적출자도 적출자와 똑같은 상속분을 받게 되었다.

이 사실을 몰랐던 미유키는 남편의 말에 사실혼 관계로 지내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했다.

입덧이 심해져서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 남편은 “대신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고 바로 옆에서 게걸스럽게 밥을 먹었다. 그런 무심한 태도에 미유키는 더욱 짜증이 났다. ‘적어도 밖에서 먹고 들어오란 말이야…….’ 외식을 하고 온다 한들 남편은 미유키를 위해 도시락 하나도 사 오지 않았다. 그녀가 “나도 배고픈데”라고 나직이 중얼거려도 남편은 “먹지 못할 것 같아서 일부러 안 사 왔어”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필요한 것 없냐고 한마디 물어보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임신했을 때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으면 얼마나 한이 맺히는 줄 알아요?”라며 째려보자 남편은 그제야 음식을 사러 부랴부랴 뛰어나갔다.

출산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배가 불러오자 잔뜩 기대에 찬 남편은 틈만 나면 배 속의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몸이 무거운 미유키가 혹시라도 넘어질까 봐 늘 신경 썼다.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그림 속의 행복한 부부처럼 보였고, 미유키는 ‘이만하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얼마 가지 않아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


다음 회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09. 상상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