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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Oct 20. 2017

03. 듣는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는 '전건부정의 오류'

<악마의 대화법>



전건부정의 보수적 오류

‘P 하면 Q이다’라는 논증 구조에서 P를 전건, Q를 후건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전건은 후건을 증명하며 이 둘의 순서는 뒤바뀔 수 없다. 다음의 예를 보자.

달걀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달걀이 깨진다.(달걀을 떨어뜨렸으므로 달걀은 깨진다.)

이러한 전건긍정은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논리가 성립하려면 반드시 전건을 긍정한 다음 후건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런데 후건을 긍정하고 둘의 순서를 바꾸거나 전건을 부정하면 완전히 상반된 결론이 나온다.

후건긍정: 달걀이 깨졌으니 달걀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다.
전건부정: 달걀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달걀이 깨지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전건부정’의 오류는 듣는 사람을 현혹시켜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는 점에서 ‘후건긍정’과 마찬가지다. 전건부정은 다른 원인도 비슷한 결과를 유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음의 예를 보자.

내가 너무 많이 먹으면 병이 날 거야. 난 많이 먹지 않았으니까 병이 나지 않을 거야.

적게 먹는 것과 병이 나지 않는 것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까? 병에 걸리는 이유는 아주 많다. 독한 술을 한 병 다 마시고 녹슨 못에 손을 찔린 다음 축축한 밖에 밤새 앉아 있으면 병이 날 것이다. 이 오류의 핵심은 언급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다른 원인 때문에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P 하면 Q이다’라는 논증 구조에서 우리는 전건을 긍정하거나 후건을 긍정할 수 있다. 둘 다 논리가 성립한다. 그런데 후건을 긍정하고 전건을 부정하면 오류가 생긴다.

그가 느리게 달리면 경기에서 진다.
전건부정: 그가 느리게 달리지 않으면 경기에서 지지 않는다.

명백하게 틀린 논증이다. 그는 느리게 달리지 않고도 경기에서 얼마든지 질 수 있다. 발목을 삐는 등 다양한 원인이 있다. 물론 전건을 긍정할 수는 있다. ‘그가 느리게 달리면 경기에서 진다.’ 또는 후건을 부정할 수도 있다. ‘그는 경기에서 지지 않았으니 느리게 달리지 않았다.’ 첫 번째 논증 방법은 ‘전건긍정의 형식’, 두 번째는 ‘후건부정의 형식’이라고 하는데 두 가지 모두 유효한 논증법이다. 전건을 부정하고 후건을 긍정할 경우는 언뜻 유효할 것 같지만 논리적 오류다.


전건부정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의 사건에 하나의 원인만을 제공하고 다른 원인은 모두 배제하기 때문이다. 즉 또 다른 가능성을 배제했기 때문에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논증하는 과정에서는 그 누구도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는 피하고 원하는 결론만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술, 담배, 여자를 모두 가까이하면 분명 오래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술, 담배, 여자를 끊어야 100세까지 장수할 수 있다.

이런 논리는 국가 사이에서 자주 발생한다. 어떤 정책을 펼칠 때 국가는 그 정책이 초래할 결과를 따져본다. 그리고 국가 전체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특정 정책을 택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우리의 군사력이 강해지면 위협을 느낀 나라들이 공격해올 것이다. 다른 나라의 적의를 없애기 위해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

이것이 사실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가 반격할 능력이 없어도 상대는 공격을 해올 수 있다.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해 전건부정의 오류를 범하곤 한다. 이것은 굉장히 보수적인 오류다. 우리가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특정 결과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납세를 장려하는 나라의 논리도 마찬가지다. 납세를 잘할수록 국가가 안전해진다고 홍보하는 것은 납세자들을 기만하는 행위다. 국가의 안전과 납세 행위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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