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
제우스와 하데스, 타르타로스 등 우주의 최고 통치자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을 보면 우선 육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육체에 대한 형벌은 저차원적이고 한정적인데 인간의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지옥의 형벌은 주로 인간의 정신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겨냥하여 무한한 고통을 준다. 또한 이런 형벌은 종료기한이 없이 영원히 지속된다. 인간 세상에서는 감형될 수도 있고, 병보석으로 풀려날 수도 있으며 최악의 경우 탈옥을 하거나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도 있다. 불교의 지옥에서도 죄인들은 업보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윤회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시시포스들’에게 주어진 형벌은 진정한 무기징역이며 심지어 죽을 자유도 없다. 그들에게 시간은 그 어떤 희망도 내포하지 않고 시간 자체가 이미 형벌인 것이다.
형벌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순환이다. 마치 엔트로피의 값이 무한소수인 것을 뻔히 알면서 끊임없이 그 값을 구하라는 것과 같다. 의미는 사라지고 허황함만 남는데 이는 인간의 본성이 견디기 힘든 것이다(때로는 당나귀도 멍에를 메고 맷돌질하는 무한반복형 노동을 거부한다). 시시포스들에게 희망은 늘 눈앞에서 그들을 유혹한다. 커다란 바위가 거의 정상에 다다르려는 순간, 달콤한 과일이 다시 코앞에 다가오는 순간, 그 순간들은 마치 선의의 장난 같다. 돌고 도는 수레바퀴는 언젠가 에너지가 떨어져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용맹스러운 독수리들도 매일 생간만 쪼아먹다 보면 영양실조나 정신이상이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다나이데스 자매들도 끝까지 버티다 보면 형벌을 내리는 신이 싫증이 나서 풀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누가 아는가, 아름다운 미인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어떤 위대한 신이 나와서 전근을 시켜줄지!
하지만 이곳 타르타로스에서는 희망이 곧 더 큰 절망을 만들어내는 또 다른 형벌이다. 절망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고 했던가, 끝이 없는 절망에서 오는 고통은 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 우리는 하루 삼시세끼를 먹고 밤에 잠을 자며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지하철을 타고 똑같은 직장에 가서 똑같은 사람들을 만난다. 마치 똑같은 나사를 장착한 로봇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매일 들르는 시장에 가서 매일 먹는 몇 가지 채소를 사고 평생 봐도 다 못 보는 드라마를 보는데 드라마의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잠잘 때 엔트로피가 최대치에 달하고 다음날 또 똑같은 프로그램에 다시 마이너스 엔트로피를 입력한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은 보기에는 단순하고 즐거워 보이지만 일단 그 습관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시시포스의 노역과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미술작품에서 시시포스가 밀어올리고 있는 바위의 크기나 중량을 아주 과장해서 표현하는데 이는 사실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시시포스의 고통은 바위의 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탁구공처럼 가벼운 것일지라도 그것을 영원히 정상에 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황당하고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