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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Oct 31. 2017

03.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

<1인자의 인문학 한국편>



인조(우유부단한 1인자) vs 최명길(현실적인 2인자)

홍타이지는 인조 14년에 국호를 ‘청’으로 고친 뒤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면서 조선에 대해 신하의 예의를 요구했다. 얼마 후 이를 알리는 청의 사신이 왔다. 척화파가 크게 반발했다. 최명길은 명분에 집착해 척화로 나아가면 나라가 위태로우리라 판단했다. 이에 이귀와 함께 외교 교섭을 통한 해결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상헌을 비롯한 대다수 신료들은 반대로 ‘숭명사대’를 내세워 강력한 척화론을 전개했다.

일촉즉발로 치닫는 상황에서 인조는 최고 통치권자로서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과감히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안이하게도 그는 대세에 편승하는 쪽을 택했다. 우유부단한 1인자의 처세가 난세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이후의 사건 전개 과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척화론의 선봉에 섰던 김상헌은 왜란이 한창 진행 중이던 선조 29년에 문과에 급제해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는 친형 김상용과 함께 척화파의 선봉에 서 있었다.

청태종의 판단으로는 중원으로 진공하기 전에 먼저 후고지우(後顧之憂: 뒤를 습격당할 염려)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인조 14년에 왕자와 척화론자 대신을 볼모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보내겠다는 국서를 전달했다. 병으로 집에 누워 있던 최명길은 즉시 인조에게 우선 청나라의 주장을 들어줘 나라를 구한 뒤 힘을 길러야 한다는 병자봉사(丙子封事)를 올렸다. 적극적으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병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정밀한 분석이 뒷받침된 주장이었다. 그 내용이 알려지자 척화파들이 그를 맹렬히 공격하고 나섰다.


청태종은 이제 말로는 조선에게 주의를 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압록강의 물이 얼기만을 기다리던 그는 겨울이 되자 만주군 7만 명과 몽골군 3만 명 등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심양을 출발했다. 당시 조선은 척화의 주장만 가졌을 뿐 이에 대한 대책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군사도 육성하지 않았고, 양곡도 비축하지 않았다. 정묘호란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입으로만 척화를 외친 것이다.

조선의 조정이 믿은 것은 의주부윤 임경업이었다. 그러나 청군의 침공을 예상해 황해도 병사 2만 명을 자신에게 붙여달라는 그의 요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진다는 소문이 돌자 백성들이 피난을 떠나고 군사들이 탈영했다. 그는 남아 있는 사람 800명을 이끌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갔다. 산세가 험해 기습전을 펴기에 좋았다. 그는 허수아비를 만들어놓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청군은 백마산성 함락 문제로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었다. 곧바로 백마산성을 우회해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당황한 임경업은 병마사 유림에게 군사 1만 명을 붙여주면 심양을 급습해 청군의 철수를 이끌어내겠다고 주장했다. 취지는 좋았으나 비현실적인 건의였다. 조정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유림이 이를 들어줄 리 없었다. 임경업을 포함한 조선의 대응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보여준다.

청군의 남진을 알리는 임경업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한 것은 12월 13일이었다. 그제야 강화도와 경성의 수비부대를 편성했다. 청나라 군사는 이미 개성을 돌파하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에 개성을 지났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그날 저녁 인조가 대신들과 함께 강화도로 가기 위해 남대문을 나설 즈음 급보가 도착했다.
“적군이 이미 고양을 지나 홍제원까지 이르렀고, 마부대가 강화로 가는 길목인 양천으로 군사를 보냈습니다.”

인조 일행은 망연자실했다. 이들은 급히 남대문 누각 위로 올라가 대책을 숙의했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군신이 남대문 누각 위에 올라가 국가 대사를 논의한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그곳에서 최명길이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고 한다.
“신이 적장을 만나보고 거병한 까닭을 문의하며 저들의 입경을 늦춰보겠습니다. 그 사이에 수구문을 통해 속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최명길은 동중추부사 이경직을 부사로 삼아 적진으로 향했다. 인조가 붙여준 금군 20명 중 대부분이 도주해 이경직과 비장 한 사람만이 최명길을 좇았다. 최명길이 간단한 술상을 마련해 홍제원으로 가 마부대를 만났다. 마부대는 인조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최명길은 인조가 이미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당장은 만나 볼 도리가 없다고 둘러댔다. 이 사이 인조 일행은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 송파나루를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도성의 백성들은 군신이 떼를 지어 수구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놀라 피난길에 올랐다. 혼란의 와중에 세자의 마부도 어디론가 도주했다. 극심히 혼잡한 상황에서 부부와 형제가 흩어지자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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