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Nov 08. 2017

10. 고통의 나날 (마지막 회)

<꼬마 철학자>



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산악지방의 겨울이 으레 그렇듯, 온통 건조하고 음울하고 끔찍하게 추운 겨울이었다. 잎이 다 떨어져 버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이 꽁꽁 얼어붙은 운동장에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모습은 서글퍼 보였다.

모두들 동이 트기 전에 기상을 했다. 날은 추웠다. 세면대까지 얼음이 얼 정도였으니까……. 선잠에 빠진 학생들은 한없이 늑장을 부렸다. 그들을 전부 다 모으려면 꽤 여러 번 종을 울려야 했다. “서둘러라, 여러분!”교사들은 옷 속으로 매섭게 파고드는 추위를 조금이나마 덜어 보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움직였다. 학생들은 그럭저럭 엉성하게 줄을 서서는 어둠침침한 넓은 층계를 걸어 내려가 혹독한 삭풍이 휘몰아치는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에게는 정말 괴롭고 긴 겨울이었다!

나는 공부를 그만두고 말았다. 자습실에 있는 화력 좋은 난로 곁에서 노곤해진 몸을 주체 못 해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고, 시베리아 벌판처럼 되어버린 다락방은 너무나 추웠기 때문에 수업시간 중에는 바르베트 카페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카페가 문을 닫을 때쯤 그곳을 빠져나왔다.

로제는 늦은 저녁에 그곳에서 펜싱을 가르쳐주었다. 시간 관계상 펜싱 연습실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카페 한가운데서 펀치를 마시면서 당구 큐대로 펜싱 연습을 했다. 심판은 하사관들이 봐주었다. 그들은 내가 아주 잘 해낼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우며 가증스러운 드 부코이랑 후작을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새 검술을 날마다 하나씩 배우라고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압생트술에 어떻게 단맛을 내는가도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 대가로 나는 그들이 당구를 칠 때 함께 어울리며 끝까지 점수를 계산해주었다.

그해 겨울은 내겐 참기 힘든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 우울한 겨울 어느 날 아침, 바르베트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데—당구를 치는 요란한 소리와 육중한 도기(陶器) 난로에서 나오는 윙윙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로제가 급히 다가와서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할 말이 있소, 다니엘 씨!”


그는 내 팔을 잡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은밀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구석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침통한 얼굴로 자신이 지금 어떤 여자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로제가 자기 가슴속에 숨겨놓은 비밀 이야기를 숨김없이 들려주자 나는 갑자기 그와 대등한 존재처럼 생각되어 다소 우쭐한 기분에 빠졌다. 스스로 조금씩 성숙해져 점잖은 어른이 되어간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 체육 교사는 자신의 긴 사랑 얘기를 되도록 감동적으로 말하려고 애쓰는 듯했다. 호탕하게 생긴 체육 교사는 장소를 밝힐 수 없는 곳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 여자는 사를랑드에서는 무척 고귀한 가문 출신으로, 자신이 결코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격이지만 그 여자를 몹시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고귀한 귀족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래서 편지를 써서 사랑을 고백해야겠는데 불행히도 체육 교사인 자신은 펜을 놀리는 일에는 그다지 능숙하지 못하다고 어물거렸다. 그리고 바람난 처녀만 같아도 별문제가 없을 텐데 상대는 무척 지체 높은 여자여서 술좌석에서나 써먹는 스타일로는 어림없으니 그게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침통해하면서 늘어놓는 얘기의 뜻을 모두 알아차렸다.

“무슨 말인 알겠어요. 당신은 그 여자에게 보낼 점잖은 연애편지를 써줄 만한 사람으로 저를 생각한 거로군요.”

체육교사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바로 그거요.”
“자, 난 당신 편이랍니다. 당신이 원할 때 시작하기로 하죠. 하지만 누군가가 써준듯한 냄새를풍기지않으려면그여자에관해서좀더상세하게말해주셔야겠어요.”

체육 교사는 몹시 경계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콧수염을 내 귀에 바짝 붙이고는 소곤소곤 말했다.

“파리 출신의 금발 여인이오. 이름은 세실리아, 꼭 은은한 꽃향기를 풍기는듯한 여자지요.”

그는 그 여자의 높은 신분 때문에 더 이상 자세한 얘기를 해줄 수가 없노라고 했다. 바로 그날 저녁 자습시간 동안 나는 세실리아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금발 여인에게 첫 편지를 썼다.

나와 신비에 감싸인 여인 사이에 기묘하고 설레는 편지 왕래가 시작된 지 한 달쯤 흘렀다. 한 달 동안 나는 하루 평균 두 통씩 사랑의 열정이 가득 담긴 편지를 썼다. 편지 가운데는 마치 라마르틴 델비르에게 보내는 편지[라마르틴이 1820년 시집『시적 명상』에서 여러 편의 시를 바치는 인물로서 낭만주의 시의 모델로 간주된다]처럼 감미롭고 부드러운 안개가 깔린 듯이 모호한 내용도 있었으며, 미라보 드 소피에게 보내는 편지[미라보의 연인으로서 그녀에게 보낸 편지들이『소피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처럼 열정적이고 사랑의 고통으로 울부짖는듯한 내용도 있었다.‘ 오, 세실리아. 때때로 황량한 바위 위에서……’로 시작해서‘그래서 죽을 것만 같소……. 당신의 사랑을 목말라 하는 로제’로 끝나는 편지도 있었다. 간혹 이런 시를 써넣기도 했다.


오! 그대의 입술, 그대의 뜨거운 입술!
그 입술을 내게 주오! 내게 주오!


지금이니까 웃으면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맹세컨대 나는 전혀 웃지 않고 아주 심각하게 그 편지를 썼다. 편지를 다 쓰면 나는 그걸 로제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하사관 다운 멋진 필체로 그걸 베껴 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련한 여인은 편지에 감동하여 자기도 사랑하고 있다는 답장을 보내왔는데, 그때마다 그는 그걸 즉시 내게 가져왔고, 나는 내용에 맞춰 또다시 지난번보다 더 농도 짙게 사랑을 고백하는 긴 편지를 써 보냈다. 날이 갈수록 은근히 나는 연애편지 쓰는 일에 만족해하며 꽤나 그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하얀 라일락이 풍기는 은은한 향기처럼 금발 여인은 한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난 멍청히 앉아서 그 여자의 모습을 눈에 그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편지 쓰는 일에 몰입하다 보면 나는 어느새 흥분해서 그걸 내가 그 여자에게 직접 써 보내는 거라고 착각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내 개인적인 비밀스러운 사연까지도 써 보냈는데,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야비하고 졸렬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내 운명을 저주하는 말로 편지를 가득 메우기도 했다. 밤에도 낮에도 나는 그 여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통스러웠다.
‘오, 세실리아, 내가 얼마나 당신의 사랑을 갈구하는지 아신다면!’

그러면, 로제가 내게 와서는 콧수염을 배배 비틀어 꼬면서 말했다.
“괴롭군, 괴로워! 그런 식으로 계속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은근히 로제를 경멸하면서도 이렇게 생각했다.
‘열정과 우수로 가득 찬 걸작을 쓴 사람이 바로 아둔해 보이는 저 빨간 콧수염의 뚱보라는 사실을 어떻게 그 여자가 믿을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체육 교사가 의기양양해서는 방금 받은 답장을 내게 가져왔다.

“오늘 저녁 9시에 군청 뒤에서 만나 잡니다.”

내 감동적인 편지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기다란 콧수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드디어 그가 금발 여인을 만나 은밀하게 사랑을 나누고 있을 밤에 나는 골방에 처박혀 어수선한 꿈자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멋진 콧수염을 기른 내게 귀부인들이 군청 뒤에서 만나자고 몰려드는 꿈이었다.

이튿날 로제가 희희낙락한 얼굴로 찾아와 달콤한 행복감에 젖도록 해준 지난밤에 대해 세실리아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나는 파리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였던 지난밤 꿈에서 깨어나 쓰디쓴 웃음을 지어야 했던 아침을 떠올렸다.

나는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꿈결처럼 행복한 하룻밤을 보내도록 허락하신 천사여……’로 시작하는 감사의 편지를 썼다. 다행히 편지를 써야 할 내 임무는 그날로 끝이 났다. 그 후로 나는‘아름다운 금발의 세실리아! 고귀하고 높으신 사랑하는 이여! 어쩌고저쩌고……’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열정과 우수로 가득 찬 편지를 다시는 쓰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09. 부코이랑 사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