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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3. 2017

01. 부담주는 줄리엣

<빗소리 몽환도>




잠깐만! 하고 내가 소리쳤다. 그리고는 재빨리 그녀를 붙들었다. 내 손이 쑤욱, 4차원 공간으로 침입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줄리엣의 손에 든 단검이 가슴팍에 꽂히려는 순간이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급박하게 말을 쏟아냈다. 의도와는 다르게 내 말이 빗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자기는 지금 우리에게 여러 모로 부담주고 있어요!”

줄리엣의 입술이 잠시 씰룩거렸다. 이때다 싶어 나는 잘 겨눈 총구에서 튀어나온 총알처럼 말을 쏟아댔다. 현대인의 말은 그렇게 스피드가 있다는 듯이.

“사랑 때문에 죽으면 어떡해요?”

그녀는, 그게 무슨 말이죠, 진실한 인간이라면 사랑을 위해 죽는 게 당연하잖아! 하는 당혹스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오십여 명이나 자살하는 시대에… 책임의 문제가…, 하는 이슈를 들먹거리려고 했다.

“그, 그건 말이죠. 우리 사회에선 그런 행위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거든요.”

왠지 윤리보다는 철학적 논고가 더 설득력이 있겠다고 감지한 나는 방향을 돌렸다.

“한 남자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건 뭔가 좀…? 더구나 죽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토록 사랑하던 로잘린을 하룻밤 만에 청산해버린 로미오의 사랑 습관을 감안하더라도, 줄리엣과의 사랑이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라는 것도 넘어가고, 젊은이의 사랑은 마음속에 있지 않고 눈과 눈의 부딪힘에 있는 것 같다는 로런스 신부의 말 따위는 생략하더라도, 과연 그는 당신의 삶을 포기할 만큼 순수한 영혼의 남자였을까요? 라고 질문하고 싶었지만 내 혀는 입안에서 꾸물거리고 말았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죠?”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가히 아름다운 입술이었다.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아, 으, 음, 어휴, 전 그저 독자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름다운 여자가 그런 방식으로 죽는 걸 도저히 볼 수 없어 참견하게 된 겁니다. 책읽기에서 독자란 그냥 방관자로 있는 것만은 아니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책이 우리를 바꿀 수 있듯이 독자도 책에 대한 이해 정도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줄리엣은, 그게 무슨 궤변인지 모르겠네요, 하는 듯이 눈을 내리깔며 등을 돌렸다. 셰익스피어가 한 묘사를 그대로 인용해보자면, 줄리엣의 몸뚱이는 작은 배처럼 혼란의 태풍에 휘말려 위태롭게 흔들렸고, 바다같이 푸른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썰물과 밀물을 이루고 있었고, 한숨은 폭풍처럼 사나워지고 거칠어졌다. 당장이라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어, 어, 잠깐요! 줄리엣 양. 제발!”

독자인 나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려고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물론 안개를 쥐듯 뭔가가 스르르 사라지고 빈손에는 아무 실체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의심했다. 하지만 두 손바닥에는 네모나고 딱딱한 책이 굳건히 놓여 있었으며 그 안에는 분명히 그녀가 있었다.

“오히려 사는 게 고통이겠죠,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요. 모든 인간은 수인이니까요….”

나는 허겁지겁 서둘러 논리와 변명을 번갈아가며 둘러댔다. 또한 사랑도 실연도 해봤지만 그것은 인생의 하나의 국면일 뿐, 고비를 넘기면 괜찮을 거라고……. 줄리엣은 어떤 대꾸도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헉, 숨을 내쉬었다. 흐트러진 지성과 감성을 모아 내가 겪은 사랑과 배신과 자살시도까지도 그녀한테 털어놓았다.

구시렁구시렁 구질구질한 디테일까지 주절주절 중중중중.

마침내 줄리엣은 먼먼 후대라도 내려다보는 듯, 로미오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고요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그건 한 개인의 좌절에 불과해요. 로미오와 저는 달라요.”

줄리엣이 슬프게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로미오의 단검을 잡았다. 나는 아찔했다. 하지만 꼼짝하지 못한 채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린 상징으로 남아야 하는 운명이죠. 두 가문의 원수의 상황을 풀기 위한 희생양으로 죽어야만 하는 거였죠. 다른 도리가 없어요! 낭만적인 사랑의 죽음이 아니랍니다. 그건 어쩌면 오해이고 곡해이자 왜곡인지 몰라요. 어찌해서 우리가 현대인에게 사랑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는지 모르지만요. 그래요, 세상이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죠. 그리고 인간이란 그 상징을 살아가는 거고요.”



“네엣? 뭐라고요……? 삶과 죽음과 사랑이 모두 상징이라고요?”

인간의 삶이 온통, 또한 인간사의 모든 것이 결국, 상징이라는 그녀의 말이 이마를 치고 갔다. 그 순간 나는 당장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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