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트렌드 노트>
2014년이었다.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 모르는 사람은 못 보고 지나칠 ‘쌀가게’라는 작고 빨간 간판, 칠판에 쓰인 오늘의 메뉴, 여기저기서 알고 찾아와 기다리는 사람들. ‘홍신애 쌀가게’ 앞 풍경이다. 오늘 도정한 쌀로 만든 집밥 같은 반상을 100인 한정으로 판매한다. 밥, 국, 제육볶음, 쌈채소와 쌈장, 오이지, 김치를 1인용 나무 트레이에 담아서 트레이째로 테이블에 놓고 먹는다.
불편한 의자, 트레이를 놓고 나면 조금도 여유가 없는 좁은 테이블, 깔끔한 디자인. 소위 정갈하다고 표현하는 ‘집밥 표방’ 밥집을 처음 경험한 것은 그때였다. 이태원 파르크, 한남동 일호식 등 식재료는 신선하고, 조미료는 덜 쓰고, 의자는 딱딱하고, 1인분씩 나무트레이에 나오는 밥집은 하나의 정형화된 포맷이 되었다. 가격은 9,900원에서 1만 3,000원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가격이 너무 비싸다, 간이 너무 싱겁다, 쟁반은 음식 나르는 데 쓰는 것이지 식탁에 놓고 먹는 게 아니라고 솔직한(?) 의견을 표방하는 어르신들도 요새 밥집에서 다들 이러고 있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집밥 같은 밥집이 뜬 지는 오래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집밥은 이 밥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메인 반찬 한 가지와 부속 반찬 두세 가지, 국물 요리로 구성된 집밥은 실제 ‘집’에서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면 집에서는 무엇을 해 먹을까?
‘해 먹다’라는 키워드에서 두드러지는 메뉴는 국수, 카레, 비빔밥, 볶음밥, 샤브샤브, 스파게티, 스테이크 등이다. 이 메뉴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도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한 그릇 음식이라는 점이다. 조리 과정도 간단해서 재료를 볶거나 굽고 소스를 뿌려서 완성하거나, 재료를 데쳐서 소스에 찍어 먹는다. 한식은 인풋 대비 아웃풋이 가장 안 나오는 식단이다. 다양한 재료를 우려내고, 숙성된 갖은 양념을 넣어 무치고, 오래도록 끓여야 비로소 한 개의 반찬이 완성된다. 게다가 반찬 하나만으로는 한 끼를 완성할 수 없다. 그렇게 준비한 반찬이 몇 가지 더 있어야 하고 거기에 국물 요리 하나, 메인 요리 하나가 별도로 필요하다.
‘집밥’ 연관 키워드의 추이를 보면 2014~15년에 비해 2016~17년은 ‘엄마’‘, 요리’‘, 국물’이 하락하고 ‘메뉴’‘, 맛집’‘, 느낌’‘, 소스’가 상승했다. ‘엄마’가 ‘집’에서 ‘밥’을 중심으로 ‘요리’한 집밥은 밥집에서나 만날 수 있다. 특히 ‘국물’ 요리는 안녕이다. 집밥은 ‘맛집’의 ‘메뉴’를 따라 하며, ‘소스’를 뿌려 완성하고, 사진 한 컷에 담길 수 있는 ‘느낌’이 중요하다.
어떤 면에서 오늘날의 집밥은 싱글의 식사방식을 닮아간다. 갖은 재료를 다 넣고 볶거나, 비비는 한 그릇 음식은 1인 식단에서 가장 선호되는 메뉴다. 싱글을 닮아가는 집밥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하나. 30대 미혼 남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아침저녁은 간단히 먹을 수 있는데 점심이 문제다. 회사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먹으면서 식사양이나 메뉴를 조절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선택한 메뉴는 새싹비빔밥. 1인분씩 별도 포장된 비빔밥용 채소는 백화점 식품관에서 구입할 수 있다. 가격은 비싸지만 그 채소들을 따로따로 구입하여 일일이 손질하고 조금씩 덜어서 다닐 수는 없다. 그래서 회사 탕비실 냉장고에 일주일 치 채소와 고추장을 넣어놓고 다닌다. 비빔밥용 예쁜 도자기 그릇도 구비해두었다.
둘. 30대 미혼 여
프리랜서라 집에서 작업한다. 아침은 굶고 점심이나 저녁 중 한 번은 요리해 먹는다. 선호하는 요리는 샤브샤브. 1인용 샤브샤브 냄비와 우드워머로 식탁에서 이자카야 분위기를 낼 수 있다. 샤브샤브 채소와 고기도 예쁜 그릇에 담고 젓가락 받침대도 필수다. 식단이 만족스러울 때는 사진을 찍는다.
셋. 30대 기혼 남
아침은 토스트, 점심은 편의점 도시락. 저녁은 아내가 차려준다. 반찬은 동네 반찬가게에서 사 먹는다. 아내는 아이 이유식을 만드느라 시간이 없다. 주말에는 마트에서 장도 보고 식사도 해결한다.
넷. 30대 기혼 여
아침은 뭐든 있는 걸 먹고, 점심은 회사에서 사 먹고, 저녁은 스파게티를 하거나 스테이크를 구워 먹는다. 생선을 굽거나, 찌개를 끓이면 집안에 밴 냄새가 안 빠진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문제로 남편과 다툰 후 한식이 먹고 싶을 때는 나가서 사 먹는다.
각기 다른 입장의 각기 다른 사람이지만 원하는 것은 ‘한 번에 해먹고 한 번에 싹 치워야 한다’로 요약된다. 결과적으로 냄새, 음식물 쓰레기, 과한 설거짓거리가 남는다면 집밥의 메뉴로는 불합격이다‘. 레스토랑’이 지고 ‘밥집’이 뜬다. 이벤트성 ‘외식’이 아니라 일상적인 ‘맛집’ 탐방이 뜬다. 밥집은 핫한 맛집일 수도 있지만 맛집과 동의어는 아니다. 집밥을 대신 해주는 곳, 한 끼에 6,000원에서 1만 몇천 원까지 쓸 수 있는 곳이다. 정성은 밥집이 가져가고, 집밥은 효율을 가져온다.
밥을 해 먹는 데 시간을 덜 쓰게 되면 집안 풍경은 어떻게 바뀔까? 매일 반복되는 삼시세끼의 노고가 사라지면 엄마는 시간 여유를 느낄까?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의 의미가 달라질까?
간장, 된장, 마늘, 양파 등이 쌓여 있던 공간이 남고, 냉장고를 채우던 밑반찬과 식재료들의 공간이 남고, 주방에서의 노동시간이 감소한다면 주방은 어떻게 바뀔까? 집안 구조는? 거실과 주방이 앞베란다 쪽에 배치되는 2베이* 설계는 계속 유효할까? 식재료를 배달받기 위해 냉장시설을 갖춘 택배 보관함이 필수가 될까?
매일의 반복적 노동에서 해방되면 삶이 간소해질까? 엄마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정의될까? 결혼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까? 삼시세끼 노고가 바깥쪽의 서비스 혜택을 누린다면, 그다음은 육아 차례가 아닐까?
유통은 어떨까? 신선한 식재료를 필요한 만큼만 그때그때 구입하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대형마트에 갈까? 냉동식품이 불량식품에 가까운 인스턴트식품이 아니라 가장 신선한 식재료의 한 형태가 되고, 나아가 냉동식품 전문매장이 생기지 않을까? 밥그릇, 국그릇 세트가 아니라, 한 그릇 음식을 담는 크고 예쁜 접시와 매트는 어디서 사는 게 좋을까? 반찬가게도 프랜차이즈 디저트 전문매장처럼 변할까?
집밥의 조건이 바뀌면 집을 지배하는 시간과 공간, 가족 구성원에 대한 기대도 바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4인 가족’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다. 실제로 한국사회에 1인 가구가 많아지고 있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혼자 사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 그 외 사람들에게도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4인용 포장을 사서 4번 먹기보다, 4인 가족이 1인분 포장을 4개 살 가능성이 높아졌다. 집밥의 변화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우선 가구경제의 기본 단위로서 4인 가족 프레임을 1인 가구 확장형으로 변화할 것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