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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6. 2017

02. 사과

<빗소리 몽환도>


언어에 대한 고찰

“사과요, 사과!”

장사꾼이 요란스럽게 떠들어댔다. 그는 트럭 안에 가득한 사과 더미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작은 단도로 매끌매끌한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동그란 빨간 띠가 끈처럼 풀려나오고 노란 과육이 물기를 머금은 채 드러났다.


“진짜 맛있어요, 아주 군침이 돕니다. 안 그러냐? 꼬마야.”

나는 꼬마가 아니었지만 그는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 장사꾼은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금붕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거인처럼 말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연극을 하듯 과장된 어조로 허공에다 외쳤다.

“방금 에덴동산에서 따왔습니다. 아담을 꼬드길 만큼 신비스런 사과요, 사과! 얼른얼른 와 보세요!”

어느새 어떤 여자가 바로 내 옆에서 사과를 고르려고 가냘픈 손가락을 뻗치고 있었다. 위층 새댁이었다. 아파트에 사는 현대판 이브는 머릿속으로 사과의 질과 사과의 값어치를 요리조리 저울질하며 섬세한 손가락으로 어딘가 흠이 있는가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더니 앞치마를 탁, 털며 돌아섰다.

“흥, 마트보다 그다지 싸지도 않네.” 라고 쏘아붙이며 얄밉게 등을 돌려 아파트로 올라가 버렸다.

그 순간 장사꾼의 목울대인 아담의 애플이 꿈틀거렸다. 그는 확성기에다 대고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뭔가를 행동하려고 했지만 그냥 참아버렸다.

“사과요, 사과! 너무도 맛있고 달콤해서 아담과 이브가 이것 땜에 타락했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장사꾼은 사과 두 개를 하늘 높이 던졌다. 허공에 던져진 사과들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가 추락하듯 떨어졌다. 그는 저글링 하는 마술사처럼 능숙하게 받아 들고는 또 떠들어댔다. 이번에는 놀이터를 향해 소리쳤다. 거기서 놀던 아이들 몇몇이 뛰어왔다. 아이들과 함께 있던 젊은 엄마들도 따라붙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장사꾼은 세 개의 사과를 공중에 던졌다. 여러 눈동자들이 하늘에 꽂혔다. 그는 연이어 네 개를, 다섯 개를, 높이 던졌다. 빨간 사과들이 곡예를 하듯 빙그르르 돌며 허공에서 차례대로 춤을 추었다. 와아, 사람들의 입이 벌어졌다.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사과들을 던졌다가 받고 다시 던졌다 받았다. 굉장한 솜씨였다. 아이들도 작은 입을 크게 벌리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깜짝할 사이에 사과 하나가 궤도에서 일탈했다. 와르르 다른 사과들도 무너졌다. 사과들이 바닥에 참혹하게 박살이 났다.

“이크! 이게 누구야? 뉴턴의 사과가 아닌가?”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뭉개진 사과를 집어 비닐 쓰레기봉투에 던졌다.

“무슨 말이냐고 하면? 요것들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달나라로 갈 수 없었죠. 이게 다 박살 난 이런 놈들 덕분이지요.”

묘기가 끝나자 아이들은 슬금슬금 다시금 흩어져버렸다. 아무도 사과를 사지 않았다. 그거야 어른의 몫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했다. 보모인 듯한 연변 사투리의 여자가 사과 몇 개를 골랐으나 돈이 없다는 핑계로 다시 내려놓았다.

“사과요, 사과! 값도 싸고, 맛도 좋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그렇게 외치는 장사꾼의 아담 애플이 또 꿈틀거렸다. 나 역시도 그 부분이 간지러워 애꿎은 침만 꿀꺽, 삼키고 있었다.

“온갖 사과가 다 있어요! 윌리엄 텔이 화살로 쏜 사과, 백설공주가 먹다 잠들어버린 사과, 세잔느의 식탁 사과, 또, 그리고 또, 아무튼 간에, 없는 것은 없습니다! 자, 어서들 와서 빨리 입에 맞는 사과를 골라 가세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그의 입에서 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머릿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젊은이가 사과가 그려진 노트북을 겨드랑이에 끼고 트럭 앞을 지나갔다. 장사꾼의 눈이 잠시 번뜩였다.

“앗! 저거 보세요. 저거! 애플이 만든 컴퓨터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맞아요! 사과를 먹으면 스마트해져요. 매일 매일 먹으면 스티브 잡스처럼 스마트해집니다. 자아, 사과 사세요, 사과!”

그는 확성기에다 대고 사과와 스마트를 번갈아가며 계속 외쳐댔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아파트 단지의 아줌마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장사꾼은 서 있는 나에게 윙크까지 했다. 아파트에 사는 주부들이 값을 깎고 덤으로 달라는 둥 소란을 피웠다. 그 틈을 놓칠세라 나는 재빨리 사과 하나를 슬쩍 했다. 그리고는 얼른 등을 돌려 도망쳤다.

내 손에 들어온 사과가 매끈거렸다. 싱싱하고 냄새도 상큼했다. 나는 하마처럼 입을 크게 열어 앙, 사과를 베물었다. 돌 같은 사과가 쩍, 소리를 냈다. 노란 과육 한 점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달콤한 물이 혀에 닿았다. 무수한 이름들로 불리었던 사과들 중의 하나가 입안으로 들어와 나의 일부분이 되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길고 긴 목록에 새로운 이름 하나를 덧붙인 것만 같은 성취감에 싱글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떳떳하지 못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목록의 한 부분이었으니까. 훔친 사과! 하고 입술로 발음해보았다.

나는 우적우적, 사과를 씹었다. 그러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다보았다. 뭔가 등 쪽이 가려운 느낌이었다. 뒤를 돌아다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트럭에 잔뜩 사과를 싣고 팔고 있던 장사꾼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왁자지껄했던 동네 아줌마들도, 사과 트럭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골목 쪽으로 갔나, 하고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반쯤 베물다 만 사과를 보며 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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