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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21. 2017

07. 놀이공원 무유위유 (마지막 회)

<빗소리 몽환도>


놀이공원 무유위유(無有爲有)

어떤 남자가 바위에 구두약을 바르고 있었다. 파트너가 된 여자애가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얘, 저 사람 혹시 조금 아까 만난 그 남자 아니니? 그녀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콧등을 찡긋대며 말했다. 앞니가 길고 도드라져 있어 토끼 같다는 느낌을 자아냈다. 머리에 토끼 헤어밴드까지 하고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에잇, 그럴 리가? 라고 대꾸했지만 나는 새우 눈으로 슬그머니 곁눈질을 했다. 남자는 땀을 흘리며 바위에 구두약을 바르며 광을 내고 있었다. 바위를 구두로 착각하고 있는 걸 보면 제정신인 건지 의심스러웠다. 여자애는 자꾸만 그가 정문에서 티켓을 판 남자와 같지 않느냐고 우겼다.


“잘 봐, 모자도 윗도리도 똑같잖아!”

사실 그랬다. 남자는 놀이공원 제복을 입고 있었다.

“옷 땜에 그렇게 보이는 거 같은데?”
“아니야, 자세히 봐! 이마랑 코랑 입모양이랑!”

그렇긴 좀 그랬다. 혹시, 하고 다시 쳐다보자 그가 싱긋 웃었다. 나 역시도 왠지 이 남자가 조금 전에 티켓과 안내문을 건네주던 남자와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스레 팔뚝에 소름이 도돌도돌 돋았다. 남자도 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의식했는지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얼른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그리고는 호주머니에서 검정 선글라스를 꺼내 코에다 걸쳤다. 놀이공원은 실내라서 선글라스 따위는 필요 없는 거였지만 남자를 잘 살펴보려면 좋은 전략이었다.

막상 선글라스를 끼고 나니 거리감이 생겨 주변이 생소해 보였다. 내 마음이 약간 차분해지는 듯도 했다. 어쨌든 눈에 걸친 안경 하나로 인해 놀이공원 전체가 이상하게 보였다. 여자애가 돌연히 인형 같았고, 들떠서 함께 돌아다니는 놀이공원의 설치물들도 장난감 같아 보였다.

“얘, 너는 그거 쓰고 있으니까 맹인 같다아.”

여자애의 말에 나는 금방 머쓱해졌다. 검은 선글라스를 썼다 벗었다 하고 여자애가 토끼 헤어밴드를 이리저리 교정하는 사이, 바위에 구두약을 칠하던 남자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아이들이 허리를 구부리며 웃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애와 나는 그쪽으로 뛰어갔다. 거기에는 키만 한 크기의 거울이 옆으로 놓여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 거울에 비친 자기네 모습을 보고 웃어댔다. 그것은 그냥 평면거울이 아니라 오목하고 볼록하게 되어 있어 그 앞에 선 사람들을 난장이처럼 만들거나 또는 길게 엿처럼 잡아당긴 형태로 비추어진 대상을 왜곡시켰다. 조금만 자세를 달리하면 순식간에 모습이 달라졌다. 먼저 온 아이들은 포즈를 취하면서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더니 금방 싫증을 내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마침내 여자애와 내 차례가 되었다. 기대에 차서 그 거울 앞에 서자마자 여자애는 금방 작은 인형처럼 작아졌고 나는 꺽다리처럼 늘어났다. 우리 둘은 다른 모습이 보고 싶어 자세를 바꾸었다. 이번에는 여자애가 꺽다리처럼 커지고 나는 난장이처럼 작아졌다. 여자애가 까르르 배를 잡고 웃었다. 그녀는 더욱 대담해져 옆얼굴을 거울에 가까이 댔다. 한쪽 이마가 못난 감자처럼 툭 불거지고 눈망울은 커다래진 몬스터가 나타났다. 예쁜 것을 좋아하고 먼지가 조금만 붙어도 털어내는 깔끔한 여자애가 자기 흉측한 모습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나는 여자애처럼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거울을 믿는 사람은 전혀 아니었지만 거울이 무서워졌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도망치듯 먼저 뛰쳐나왔다.

여자애도 얼마 안 가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지루해하는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먹자는 제안을 했다. 내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초콜릿 하나, 바닐라 하나! 하고 주문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기분은 아니었으나 여기에 놀러 온 것이 처음이라 여자애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행동하는 쪽이 남자답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남자가 아이스크림콘 두 개를 건네주면서 살짝 윙크를 했다. 앗, 저 남자, 어디선가 본 듯한데, 떠올려봤지만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여자애는 뽐내는 듯한 폼으로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아댔다. 나도 그녀처럼 해보려고 했으나 내 것은 돌 같았다. 아니 고무 같았다! 겉모양만 닮은, 고무로 만들어진 모조품처럼 내 것은 달지도, 부드럽지도, 초콜릿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도 이상했다! 나는 여자애가 혀로 핥는 모습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녀가 먹는 아이스크림은 혀로 핥아댐에 따라 작아지고 있었다. 여자애는 흘끔 나를 쳐다보며 핀잔을 주었다.

“촌스럽게 아이스크림 하나도 제대로 못 먹니?”

나는 차가운 음식을 먹으면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아이스크림콘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왜 하필이면 내 것만 모형이었을까,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누군가에 의해 속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빼서 좌우를 둘러보고 위아래를 쓰윽 살펴보았다. 놀이공원을 덮고 있는 지붕은 유럽식 돔 형태였다. 천장은 수많은 네모창문들로 엮어져 있었는데 죄다 잠가져 있었다. 원래부터 장식일 뿐, 열려진 적은 없는 듯했다. 천장을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이 안에 갇혀버린 것만 같아 답답하고 두려워졌다. 만약 이 순간 여기에 전기가 꺼지기라도 한다면, 하는 상상을 하자, 전기로 작동하던 놀이공원의 놀이도구들이 멈추어져 있는 광경과 갑자기 이곳이 무덤처럼 썰렁하게 변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공포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여자애가 눈치를 챌까 봐 몸을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여긴 좀 시시하다. 우리 다른 데로 가보면 어때?”

그러자 여자애는 신이 난 듯 토끼처럼 먼저 뛰어갔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뛰어가고 있었다. 대체로 한 아이가 앞서서 뛰어가면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따라갔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따라가는 군중처럼 아이들도 그랬다.

기차를 타면서부터 여자애는 흥겨워 조잘댔다. 기차는 맴맴 궤도를 따라 돌기만 할 뿐, 어디를 가는 게 아니었다. 같은 곳을 순환하는 기차였다. 이따금 빨간 신호등 앞에선 정지했고, 파란 등이 켜지면 달렸다. 지루할 때쯤 되면 폭폭, 기차소리도 울려주었다. 어찌 보면 우리들의 일상과 다를 바 없는 기차였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합창하듯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해방감이라도 느끼고 있다는 듯이!

기차가 멈추자 여자애와 나는 하차했다. 그리고는 지루한 시간을 재미있게 해줄 곳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우리가 잠시 망설이다 결정한 곳은 다름 아닌 해골이 그려져 있는 해적선이었다. 그 배에 막 승선하려고 긴 줄을 기다리는 동안, 나도 모르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뭔가 수상쩍은 낌새가 느껴졌다.

해적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배를 작동하고 있는 기계가 보였다. 그게 복잡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위아래로 흔드는 단순한 기계 장치였다. 진짜 해적선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작동기계를 보자 언뜻 이상한 생각이 떠올려졌다. 누군가가 우리를 놀리고 있는지도 몰라, 우린 어쩌면 속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이들은 해적선이 올라갈 때면 행복감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야호, 야호, 두 손을 번쩍 들면서. 그러다가 배가 내려갈 적엔 시시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배가 올라가면 성공했다는 듯이 기뻐하고, 배가 내려가면 게임에 졌다는 듯이 싫어했다. 분명히 그것이 기계에 의해서 정확히 작동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기쁨과 실망은 배가 올라가고 내려감에 따라 출렁거렸다.

“얘, 뭘 그렇게 심각해 하는 거야?”

여자애가 내게 불만이 있는지 뽀로통해졌다. 무슨 적대감인지 모르겠으나 갑자기 그녀는 내 뺨을 꼬집었다. 뺨은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아얏! 왜 그래? 저건 기계로 움직이고 있단 말이야! 누군가가 조정하고 있어!”

막상 소리를 지르고 나니, 나는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거야, 당연히 그런 건데, 뭐?”

여자애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넌 모르고 있겠지만, 저 해적선은 가짜야! 가짜라니까! 만들어진 거라고! 이 놀이공원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고 있다고!”

나는 항의하고, 주장하고, 폭로하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여기서 노는 건, 정말로 노는 게 아니라구! 그저 착각하는 것이야. 조정당하고 있으면서 재미있다고 말이야. 저 건물도, 이 보도도, 기차도, 해적선도, 놀이공원 모두가 진짜가 아니라고!”
“야야, 너, 진짜 재미없네! 너야말로 정말!”

여자애가 또 내 뒤통수를 쳤다. 그리고는 재빨리 달아났다. 나는 얼얼해졌다. 머리에서 뿔이 튀어나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 그녀를 잡으려고 얼떨결에 손을 뻗쳤다. 여자애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가 벌써 멀리 가 있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다보며 소리쳤다.

“쳇, 너무 잘난 척하지 마! 누가 그걸 모르겠니? 가짜라도 진짜라고 믿으면 되잖아!”

그녀는 하늘을 날 수 있는 수소 풍선이 있는 쪽을 향해 뛰어갔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뛰어가고 있었다. 한 아이가 뛰어가면 모든 아이들도 따라서 뛰었다. 그랬다, 이유도 모르는 채 아이들은 늘 그랬다.

“그렇게 보이더라도 진짜라고 여기고 놀면 되는 거야! 이 바보야!”

그녀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리 있는 것처럼 들려왔다. 나는 뛰던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 여자애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쪽으로 사라진 거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바위를 구두약으로 닦고 있던 남자가 다시 지나갔다. 나는 굳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커다란 바위를 가볍게 어깨에 메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마치 연극이 끝났다는 듯이!

나는 부서진 태엽인형처럼 몸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스쳐 간 광경들이 떠오르고, 보이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으로, 괜히 가슴도 찡해지고 슬퍼졌다. 그녀가 사라져서일까, 아니면 그것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 나는 헛되이 가슴을 쓰윽 문질러보았다. 왠지 이것만은 가짜가 아닌 듯했다. 너무나도 리얼했다! 혹시나, 하고 두리번거리며 나는 놀이공원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기가 어디인지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무유위유(無有爲有):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 장자의 <제물론>에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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