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에서>
어떤 기준을 통해, 인간이 무슨 의미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자신의 생각을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나는 집 대문을 향해 가면서 길가 오른편에 있던 철쭉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덤불 속에 있던 동물, 쥐나 새 또는 새나 쥐를 발견한 고양이나 족제비가 내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너무 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고양이가 내는 소리치고는 큰데.’
이 생각은 고정적이고 확고하게 머릿속에 각인됐다. 마치 내가 실제로 고양이를 덤불에서 발견하고는 “고양이가 내는 소리치고는 큰데!”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다음과 같이 변형됐다. ‘분명 고양이보다 훨씬 큰 동물이야!’ 이런 생각은 언제든지 끄집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양이보다 더 크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낼 동물은 이 철쭉꽃밭에 있지 않았다. 나는 마치 원시인이 된 기분이 들었고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 알아차리고는 뒤로 펄쩍 뛰어올라 곧장 도망쳤다. 정제된 생각이라는 우회로를 거치지 않은 채 한 행동이었다. 이렇게 아무런 일관성이 없는 문장에 대한 기억만 남아 있다. 그 문장은 내 머릿속에서 아주 침착하게 표현됐다. ‘분명 고양이보다 훨씬 큰 동물이야!’
나는 이 무서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 내가 겪은 납치 상황은 아주 상투적이었고 TV 드라마에서 수백 번은 보았을 패턴과 아주 일치했다. 비현실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엄청난 상황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던 철쭉 덤불은 대문 오른편에 있는, 높이가 1미터가 넘는 담벼락 앞에 심어져 있었다.
바로 그 덤불에서 복면을 한 남자가 나왔다(뛰어나왔을까? 아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덤불이 그가 있던 쪽으로,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또렷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났군요.” 하지만 막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했다.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난 모든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강도가 열쇠 주인을 위협해 문을 열고 그 다음으로 (있지도 않은) 금고를 열게 하는 것인가? 이런 습격을 한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키가 크고 어깨도 딱 벌어졌다. 어깨가 얼마나 넓은지 자신의 키만큼 딱 벌어진 것 같았다. 아니, 아마도 키보다 더 벌어진 듯했다. (정확히는 모르겠다) 내 앞에는 남자가 쓴 마스크만 보였으니까. 복면에는 눈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그래서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영화 <패트리어트 게임>에 등장하는 테러리스트가 쓴 복면 같았다.
대문 앞 몇 미터 공간이 마치 하나의 함정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입구는 좁았고 좌우로는 허리 높이의 담장이 있었다. 담장 뒤편 왼쪽으로 2미터 아래를 내려가 오른쪽을 보면 철쭉 덤불이 있었다. 내가 여기서 도망가려면 아주 민첩하고 운동신경이 매우 발달하고 더구나 침착해야 했다. 왼쪽 방향으로 재빠르게 뛰어올라 달아나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아무런 신체적 충격도 받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몸을 돌리면서 잽싸게 달아나는 일은 불가능했다. 남자는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나를 공격하면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겠지. 나는 항상 싸움 면에서는 열등했으니까. 심지어 학창 시절 교정에서 열두 명에게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지금 납치범과의 싸움에서 이기든지 아니면 어쨌든 그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든 상관없이 나는 가해자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고통과 경악을 맛보았다.
나는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던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육체적 공격에 대한 나의 성찰은 상당히 이론적일 수밖에 없었다. 즉 누군가가 공격을 하면 양손을 활용해 공격하기 때문에 얼굴을 보호하지 못한다. 내가 공격자의 눈에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한다면 아마도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격자에게 달려들어 양쪽 엄지손가락을 괴한이 쓴 복면에 뚫린 두 구멍 안으로 짓누르려고 하다가 갑자기 그만두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어차피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어딜 보아도 내가 괴한에게 상처를 입히고 부상을 입힐 만큼의 능력은 없어 보였다. 기껏해야 상대방이 아파하기만 해도 다행이다. 나는 복면 괴한이 소리를 지르리라고 믿는다. 나 또한 소리치리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아마 누구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이 싸움은 조용히 진행되겠지. 내 오른쪽 엄지손가락은 괴한의 오른쪽 눈을 향했다. 손가락이 눈꺼풀 아래 근처에 닿았다. 아마도 엄지손가락으로 눈을 세게 눌러버릴 수 있을 것이다.
순간 남자는 내 머리를 후려쳤다. 나는 고개가 휙 돌아간 채 나동그라졌고 쓰고 있던 안경은 돌 위로 떨어졌다(그리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나약한 지식인은 싸움을 포기하겠다는 결정을 확고하게 내린다). 누군가가 (철쭉 덤불에서 또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내 머리를 붙들고 담장에 짓찧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