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혼자 살걸 그랬어>
저는 2016년에 세계적 권위의 아버지 교육기관인 TWNAF(The World Needs A Father: 세상엔 아버지가 필요하다)의 마스터 멘토 트레이닝(Master Mentor Training) 과정을 공부하고 수료했습니다. 설립자인 카시 카스텐스(Cassie Carstens) 목사가 직접 지도했는데 지금까지 제가 받은 어떤 교육보다 유익했습니다. 아니, 그런 말로는 부족할 만큼 충격적일 정도로 놀랐고, 그래서 좋았습니다. 20년간 이 분야를 공부했고 10년간 가정행복코치로 살아온 저였지만, 교육을 받는 동안 발가벗겨진 느낌이었지요.
강사께서 강의 중 수강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결혼해서 아내를 사랑하셨습니까?”
저는 주저 없이 손을 들었고 몇몇 수강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분이 제일 앞자리에 앉은 저를 향해 말씀하셨어요.
"그게 거짓이란 걸 3분 안에 증명해드리죠."
다들 무슨 말인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는데, 그분은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그건 아내를 사랑한 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한 것입니다. 아내가 내 기준과 기분에 맞을 때는 사랑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지적하고 비난하고 미워했다면, 그것은 아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한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아내상(그분은 이걸 ‘우상’이라고 불렀죠)을 그려놓고, 아내가 거기에 합당할 때는 사랑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미워하지 않았나요. 그건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우상을 사랑한 것이죠.”
아,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구나……. 지난 30년의 결혼생활을 돌이켜보니 그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연애 때나 신혼 때는 아내가 뭘 해도 예뻐 보였어요. 뭘 해도 잘하는 것 같았고, ‘아, 나는 장가 잘 갔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 ‘긍정적인 편견’을 가졌던 거예요.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생각지 못한 실망, 논쟁, 좌절을 겪다 보니 어느새 서서히 부정적 편견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이제 아내가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저를 실망시키는 것들이었어요. 뭘 해도 잘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끔 제 마음에 들 때는 아내를 예쁘게 바라봤지만 대부분은 그 반대였죠. 언젠가부터 ‘아, 나는 장가를 잘 못 간 건가?’ 하고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를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한 게 아니라 저 자신을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저는 다시 태어났어요. 이제부터 저는 아내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기분이든, 심지어 저를 비난할지라도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게 결혼의 참모습이니까요.
아내의 생일날, 아내는 생일 선물을 기다리는데 남편이 빈손으로 귀가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심통이 난 아내를 데리고 남편이 뒤늦게 생일을 축하해준다며 자기가 좋아하는 삼겹살을 사준다면 어떻겠습니까? 이건 사랑이 아닌 거죠.
제 친구 중에 CEO가 있습니다. 평소 아내 사랑 표현을 잘 안 하는 친구인데, 제 조언을 듣고 아내에게 모처럼 데이트 신청을 했대요. 잘한답시고 평소에 거래처를 접대할 때처럼 근사한 일식당을 예약해 비싼 회로 대접하고, 2차로 친구들과 자주 가던 단란주점에 아내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날 데이트 결과가 어땠을까요? 여성분들은 쉽게 짐작했겠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데이트였습니다.
“당신 평소에 이런 곳에 다니는구나!”
아내는 너무나 값이 비싼 일식당에 단란주점까지 풀코스로 안내하는 남편을 보며 누구 취향에 맞춘 것이냐고 화를 냈다고 합니다.
아내가 원한 데이트는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비싸지 않아도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맛난 음식을 먹고, 커피 마시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기대했을 겁니다. 오랜만의 데이트에 두근두근 기대하며 남편을 만나러 나갔을 아내가 실망할 만합니다. 이건 소에게 맛있는 고기를 먹인 것과 같고, 사자에게 몸에 좋다며 풀을 먹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제 친구가 이런 실수를 한 건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아내의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사랑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배우자는 그걸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는 건 뭘까요. 상대의 마음을 알고 헤아리는 것입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기를 바라는 만큼 아내도 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길 바랄 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의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존중을 의미하는 영어 리스펙트(respect)의 어원은 라틴어 ‘레스피세레(respicere: ‘다시 보다’라는 뜻’)입니다. 상대를 존중하려면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를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제 아내가 저한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발 내가 원하는 사랑을 해줘요. 당신이 원하는 걸 하지 말고…….”
저는 그 말을 들을 때처럼 답답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나 : 그러니까 당신이 원하는 게 뭐냐고? 좀 알아듣게 말을 해봐. 말을 해야 알지!
아내: 답답하다는 듯이 아직도 그걸 몰라? 결혼 20년이 넘었는데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 그러니까 당신이 안 된다는 거야!
나 : 우와,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네. 그러니까 말을 해달라고, 말을!
아내: 말해줘? 공감, 배려, 애정 어린 보살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나 : 뭐? 공감? 배려? 애정 어린 보살핌? 그런 추상적인 단어를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 구체적으로 말해줘야 알지!
아내가 제게 원하는 게 뭘까요. 공감? 배려? 애정 어린 보살핌? 이런 추상적인 단어를 남자들은 모릅니다. 이해하지 못해요. 이 책을 읽는 아내 분들, 부디 남자들에게 구체적인 단어로 표현해주세요.
저는 답답해하다가 아내가 말한 각 단어별로 문장으로 바꿔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알 것 같더라고요. 아내가 수없이 되뇌었던 말을 종합해보니 이렇습니다.
■ 유능한 남편보다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남편을 좋아한다.
■ 바쁜 남편보다 다정다감한 남편을 좋아한다.
■ 까칠한 남편보다 편안한 남편을 좋아한다.
■ (아이들에게) 직장 상사 같은 아빠보다 친구 같은 아빠를 좋아한다.
■ 운전 중 갑자기 끼어든 차량 운전자를 향해 쌍욕 하는 남편보다, 웃으면서 “어서 들어오세요~ 급한 일 있으신가 봐요?”라고 말하는 남편을 좋아한다.
■ 어느 날 뜬금없이 장미 한 송이 사 들고 들어오는 걸 좋아한다.
■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브런치 먹으러 가자고 하는 걸 좋아한다.(아내가 먼저 가자고 해서 간 적은 있어도 제가 가자고 한 적은 없거든요.)
■ 여행에서 돌아오는 아내를 집 앞 지하철역으로 마중 나오는 걸 좋아한다.(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3분 거리입니다.)
정리해보니 일 잘하는 남편, CEO 남편, 혼내는 남편이 아니라 다정다감하고 자상하며 편안히 기대고 싶은 남편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렇게 쉬운 거였어? 이게 돈이 들어? 고난도 기술이 필요해? 이걸 왜 못해? 그런데 그게 의외로 쉽지 않더라는 거죠.
저는 이렇게 만인 앞에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럼 과연 자녀들은 사랑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