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위한 그림 육아>
〈가브리엘과 장〉
르누아르의 작품은 세상의 빛과 행복을 모두 화폭에 옮긴 듯 따스하다. 특히 〈가브리엘과 장(Gabrielle et Jean)〉은 르누아르의 어린 아들 장과 유모 가브리엘이 다정하게 놀이하는 모습을 담았다. 아기와 놀아주는 그림은 아름답지만 솔직히 아기와 놀아주는 아빠 엄마의 현실이 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마음은 ‘책을 읽어줘야 하는데……’ 하면서도 종일 아기를 보다 저녁때가 되면 목소리도 안 나오고 피곤하기도 하다. 아이가 원하는 만큼 놀아주지 않아 종종 보챌 때면 내 표정에서 육아의 무게가 그대로 드러나곤 했다.
종일 피곤하게 아기를 보다 아이가 100일 남짓 되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침마다 기분이 좋은 아이가 신기하다고. 어쩌면 아기는 아침마다 저렇게 좋아서 웃을까? 그러고 보니 살아온 삶이 고작 100일인 아이에게 하루는 얼마나 길고 특별한 의미일까?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 익숙하지 않아서 아기는 그 하루의 소중함과 기쁨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나에게는 비슷한 일상이 아이에게는 아주 길고 특별한 시간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하자 피곤해도 더 많이 놀아주고 사랑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어른으로 살다 보니 상대적인 시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 어른들은 아주 어릴 적의 감정은 잊고 살아가니까.
3세 이전 아이에게 애착 형성은 매우 중요하다. 주 양육자의 따뜻한 스킨십과 사랑한다는 표현, 놀아주는 시간과 온화한 태도는 아이에게 신뢰감을 형성해준다. 반면 예상치 못하게 주 양육자와 떨어지는 시간이나 무관심한 태도, 부족한 스킨십은 아이를 불안한 정서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다.
아이가 엄마와 떨어지면 바로 눈물을 흘리는 것도 본능적으로 자신이 보호받아야 할 여린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가 악을 쓰고 울 때의 두려움은 분명 어마어마한 크기일 것이다. 그 불안감 속에서 엄마의 체온은 얼마나 따스한 안정감이 되어줄까? 누군가에게 간절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종종 엄마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피곤할 때마다 ‘울어줘서 고마워’, ‘엄마를 찾아줘서 고마워’, ‘엄마 품에서 즐겁게 놀아줘서 고마워’라고 생각을 하니 돌아오지 못할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곤 했다.
말도 못 하는 아이가 엄마 품에서 나누던 기억이 어른이 되어서까지 남아 있지는 않겠지만 볼을 맞대고 나누던 체온에서 엄마의 사랑이 자연스레 전해졌으면 한다. 그 사랑이 아이의 감정에 깊이 내려앉아 안정적인 정서를 가진 아이가 되기를.
어리고 여린 아이의 입장이 되어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니 아이의 모습에서 포근한 안정감이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동안 르누아르의 그림을 유모의 시선에서 보았지 아기의 시선에서 보지 않았었다. 아이의 시선으로 그림을 보며 린이에게 그림 속의 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린이는 자기도 아기면서 “아기, 아기” 하고 반응한다. 르누아르의 그림은 엄마와 아기 모두에게 정서적 안정을 전한다.
이번 주 아이의 방문에 어떤 작품을 붙여놓을지 고민하다 르누아르의 작품을 붙이고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를 틀어놓았다. 빛과 행복이 가득한 르누아르 작품처럼 따뜻하고 편안해지는 곡이다.
건강하게 놀고 보채는 아이에게 고맙다. 아이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아빠 엄마에게는 가장 큰 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