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이쿠코, 좀 별나다니까.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by 더굿북

이쿠코, 좀 별나다니까. 그래 가지고 남자 친구가 어떻게 생기겠어.


하루코가 뜨거운 물에 탄 소주를 홀짝거리면서 구마키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정작 당사자인 이쿠코는 남자 친구와 함께 침대 속에 있었다.

새끼 고양이가 털실 뭉치를 갖고 노는 일러스트가 그려진 크림색 플란넬 잠옷을 입은 이쿠코는 블랭킷과 오리털 이불을 덮고 얌전히 누워, 아직 만난 지 며칠 안 된 남자 친구의 얼굴을 검사하고 있었다.

피부가 참 곱네.

그렇게 생각했다. 손가락 끝을 살며시 대본다. 부드럽다. 남자는 입술을 반쯤 벌린 채 잠에 빠져 있다.

이 사람, 수염 깎을 필요 있으려나.

새벽 한 시, 시간을 생각하면 남자의 피부는 신기하리만큼 매끄럽다. 이쿠코는 볼을 비벼본다. 볼의 감촉은 볼로 확인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기 때문이다.

어린애 피부 같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입술은 도톰한데 콧대는 날카롭다. 머리칼과 눈썹도 풍성하다. 좁은 이마도 귀엽다. 이쿠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두 언니도 그렇지만 이쿠코는 술이 세다. 오늘 밤에도 맥주와 정종을 꽤나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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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이쿠코는 몸이 따끈해졌을 뿐, 딱히 취기는 돌지 않았다. 만난 지 며칠 안 된 남자 친구는 곤드레가 되어서, 이쿠코가 샤워하는 동안을 채 기다리지 못하고 잠이 들었는데.

블랭킷 속에서 남자의 손목을 찾아 꺼내, 팔도 검사한다. 나만큼이나 근육이 없네, 하고 이쿠코는 생각한다. 새하얀 팔. 가지런하게 손질한 손톱이 예쁘고 깔끔했다.

남자는 알몸이나 다름 없는 꼴로 자고 있다. 스물여섯이라고 했다. 이쿠코는 지난주에 스물아홉이 되었다.

남자의 몸에 딱 달라붙어 그 팔을 자신의 몸에 감아본다. 목덜미와 어깨에. 이쿠코는 눈을 꼭 감고 살며시 숨을 들이쉬었다. 어렸을 때 있었던 여우 목도리가 떠올랐다. 남자의 팔은 꼭 여우 목도리 같았다.

그래도 이쿠코는 파워가 있으니까 괜찮아.

구마키는 그렇게 말하고 오징어 젓갈을 입에 넣었다. 하긴,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하루코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전혀 아니라고.

내 말은 파워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하지만 구마키에게 그걸 설명하는 것은 헛수고다. 구마키는 남자니까. 남자는 뭘 잘 모른다.

그래서 하루코는, 이쿠코의 문제는, 하고 속으로만 생각한다. 이쿠코의 문제는 파워가 너무 넘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걱정이야?”

구마키가 그렇게 물어, 어이가 없는 하루코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 우리는 한솥밥 먹고 자랐어. 한솥밥 먹고 자란 자매는 서로에게 걱정 같은 거 안 해.”

구마키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고는 “오호” 하고 대꾸했다. 젓가락으로 젓갈을 집어 하루코 앞으로 내민다. 하루코는 눈을 감고 입을 벌려 차갑고 탱글탱글하고 촉촉한 그것을 받아 삼킨다. 그리고 감격스럽다는 듯이 아, 하고 한숨을 내쉰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행복해진다.

“이리 와.”

손을 잡아 구마키를 일으켜 세우고, 침실로 간다.

하루코와 구마키는 같이 산 지 2년이 되었다. 구마키는 스포츠 라이터, 호칭은 그럴싸하지만 수입은 별로 없는 글쟁이다. 마음이 약해서 오히려 사랑스럽다고 하루코는 느끼고 있다. 키가 크고 뼈대는 우람한데 얼굴은 동안이고, 뚜렷한 쌍꺼풀에 눈가가 약간 처진 것도 섹시하게 보여 좋다 여긴다.

여행을 좋아하는 하루코는 여행지에서 구마키를 만났다. 3년 전 겨울의 일이다. 우즈미야의 — 하루코는 가까운 곳을 여행하는 일이 많다. 여행을 좋아하고 월급도 꽤 세지만, 유럽이나 미국을 희희낙락 돌아다니는 것은, 또는 인도나 중국으로 떠나는 것은 왠지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술집 카운터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을 때, 하루코는 구마키를 착해 보이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착한 남자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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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해보고 싶다.

하루코의 연애는 늘 그렇게 시작된다. 구마키는 일 때문에 그곳에 와 있고, 동행은 없다고 했다. 하루코는 그렇다면 오늘 밤 관계를 갖는 것은 간단하겠다고 계산했다. 하루코는 연애의 시작에는 언제나 적극적이다.

그 결과, 거의 수입이 없는 남자가 굴러들게 되었다. 구마키는 더없이 착했다. 하루코가 미처 계산하지 못했을 정도로 착했다.

이누야마 하루코는 세 자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1967년 2월이다. 하루코가 태어난 날, 도쿄에는 눈이 내렸다. 물론 하루코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부모님에게 그렇게 들었다. 하루코는 자신이 눈 내리는 날 태어났다는 사실을 중요시했다. 덴 흉터도 그렇다. 하루코는 세 살 때 겨울, 석유스토브에 올려놓은 주전자를 뒤집는 실수를 했다. 다행히 큰 흉터는 남지 않았다. 눈을 찡그리고 보면 겨우 보일까 말까 한 흉터가 발등에 남아 있을 뿐이다. 하루코는 지금도 그 흉터가 자신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매는 모두 도쿄에서 자랐다. 음식점을 하는 부모님이 돈이 많아, 지금 생각하면 꽤 호사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자매가 그리운 심정으로 ‘2번가 집’이라 부르는 그 집은 이제, 조그만 맨션으로 재건축되었다. 그 한 집에 어머니가 살고 있다.

이누야마 집안에는 가훈이 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그 때를 모르니 전전긍긍하지 말고 마음껏 즐겁게 살자. 그 가훈을 자매는 각각의 방식으로 신조 삼았다.

새벽은 흐트러진 침대가 있는 흐트러진 좁은 침실의 공기마저 깨끗하게 한다고 하루코는 생각한다. 어제 마신 술의 냄새까지, 새벽의 어스름한 방에서는 나쁘지 않게 생각된다.

부엌에 가서 보일러를 켜고 커피 메이커의 스위치를 누른 후에 샤워를 했다. 11월의 새벽 여섯 시, 아직은 조금 어둡다. 그 어둠과 한기를 느끼기 위해, 하루코는 욕실의 불을 켜지 않았다. 몇 분 동안 뜨거운 물을 한껏 맞았다. 올리브 오일이 섞인, 냄새도 이상한 데다 거품도 잘 안 나는, 그래도 피부에는 좋다는 바디 샴푸로 몸을 씻는다. 그리고 거품은 잘 나지만 쓰기에는 껄끄러운, 흑설탕이 섞여 있어 피부의 저항력에 좋다는 비누로 세수를 하고, 해초 성분이 섞여 있고, 거품도 잘 나고 상큼해서 마음에 드는 샴푸로 머리를 감고 나와 목욕 가운을 걸치고 부엌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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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구석에는 조그만 책상이 있다. 거실이 구마키의 작업실로 바뀐 탓에 하루코는 부엌에 책상을 놓고 자기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책상 위에는 책과 신문과 우편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 산더미 어딘가에는 대여점에서 빌려온 비디오도 있을 것이다. 하루코는 보고도 못 본 척 내버려두고 있다. 정리정돈은 딱 질색이다.

침실로 돌아와, 얼른 나갈 준비를 한다.

“다녀올게.”

자고 있는 구마키에게 그렇게 말했다. 매일 아침, 하루코는 거실 창문을 연다. 전날 밤 먹고 마신 그릇이 대개 그대로 있기 때문에 집 안 공기가 탁하다. 구마키와 살기 시작한 때부터 집안일은 그가 도맡고 있다.

“오늘은 늦을 거야.”

현관에서 구두를 신으면서 말했다. ‘어’와 ‘아’의 중간쯤 되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조심해서 다녀 와” 하는 말이 들렸다. 하루코는 혼자 미소 짓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이제 막 밝은 이른 아침의 세상으로.





베스트셀러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12회 연재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라는 가훈을
각각의 방식으로 신조 삼은 세 자매의 연애, 결혼, 사랑 이야기


언제나 한국 독자들에게 환영받는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라는 느긋한 제목의 이 책은 약 2년간 일본 여성 월간지 『베리(VERY)』에 연재되었던 장편 소설이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세 자매의 삶, 연애, 결혼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수많은 여성들에게 공감을 자아내며 인기를 얻었다. NHK에서 「그, 남편, 남자 친구」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되기도 했다. 제목을 보고 평화로운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남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하며 아등바등하는 첫째 아사코, 순박한 연인과 열렬한 연애를 하면서도 다른 남자의 육체적 매력에는 쉽게 넘어가는 커리어우먼 둘째 하루코, 여러 남자와 깊은 감정 없이 섹스를 하고 종종 이웃집의 소박한 가정주부를 동경하며 훔쳐보는 막내 이쿠코. 이들 자매의 부모는 아버지 쪽의 외도로 인해 이혼했다.

세 자매의 삶은 ‘세상의 상식’에 따르면 불건전하고 불완전하다. 이들 자매 집안의 가훈이자 책 제목인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는 마냥 즐겁게만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민하지 말고’라는 건 세상 시선에 나를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는 것, ‘즐겁게 살자’라는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으로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는 이쿠코의 입을 빌려 ‘가족은 개인적 성역이자 구속’이라고 표현한다. ‘나’를 만들어낸 근원, 어디로 가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이란 존재 안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나다운 나’로 존재할 수 있다. 한때 2번가 집에 단란하게 모여 살았던 이누야마 집안의 세 자매는 이제 각자 다른 불안과 희망을 떠안고 살지만, 여전히 서로를 지탱하며 나아간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서 즐겁게 살기 위해.



지은이 | 에쿠니 가오리(江國香織)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 화법으로 사랑받는 에쿠니 가오리는 1964년 도쿄에서 태어나 미국 델라웨어 대학을 졸업하고 1989년 『409 래드클리프』로 페미나상을 수상했다. 동화부터 소설, 에세이까지 폭넓은 집필 활동을 해나가면서 참신한 감각과 세련미를 겸비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으로 무라사키시키부 문학상(1992), 『나의 작은 새』로 로보노이시 문학상(1999), 『울 준비는 되어 있다』로 나오키상(2004), 『잡동사니』로 시마세 연애문학상(2007), 『한낮인데 어두운 방』으로 중앙공론문예상(2010)을 받았다. 일본 문학 최고의 감성 작가로서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함께 일본의 3대 여류 작가로 불리는 그녀는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도쿄 타워』,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좌안 1ㆍ2』, 『달콤한 작은 거짓말』, 『소란한 보통날』, 『부드러운 양상추』, 『수박 향기』, 『하느님의 보트』, 『우는 어른』, 『울지 않는 아이』, 『등 뒤의 기억』,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등으로 한국의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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