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상대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대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될 수는 있다.
괴로움을 안고 있는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 해도, 아무리 진심으로 대한다 해도 인간은 상대의 마음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다른 스태프와 의견이 맞지 않아 괴로웠던 적도 있습니다. 같은 직장에서 똑같이 환자분들을 생각하며 일하고 있어도 서로의 생각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까요?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서로에게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 되어줄 수는 있다.”
마치 무슨 선문답 같습니다만 저는 늘 이런 희망을 품으면서 환자분들을 대합니다.
어쩌면 이분들은 나를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더 환자분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남자분을 간호한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성실히 일했던 그분은 정년퇴직 후에 부인과 함께 세계 여행을 하기로 약속했죠.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안 좋아서 검사를 받았는데 암이 발견되었죠.
이미 암은 간장과 뇌로 전이되었던 터라 치료는 어려우며 앞으로 1년 정도밖에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젊은 시절에 열심히 일한 만큼 노후에는 그간 아내의 노고를 위로해주고 싶었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일했을까?”
“내 인생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처음에 그 환자분은 절망하고 괴로워하며 지금까지 왜 살아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의미조차 잃어버리고 만 거죠.
이러한 환자분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저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고통은 해결되지 않더라도 힘들 때 ‘힘들다’는 말을, 괴로울 때 ‘괴롭다’는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상대가 있으면 큰 위안이 됩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어느 정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때로는 섣부른 위로보다 잠자코 들어주는 것이 더 큰 위안이 되죠.
인생 마지막 단계의 치료, 즉 완화 의료에 몸담고 있는 우리는 날마다 괴로움을 안고 있는 환자분들과 마주합니다.
설령 마음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환자분이 저를 ‘나를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평온한 마음을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늘 그런 희망을 품고 환자분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함께 고통을 느끼려 합니다.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_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