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여인들>
이집트의 풍요로움은 모든 로마의 지배자들이 탐내는 보물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왕위를 되찾은 후 이 보물을 한 번도 빼앗기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의 권력자들을 차례차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이집트의 번영을 이끌었다. 이집트의 미래를 위해, 클레오파트라의 연인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주인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클레오파트라의 핏줄인 카이사르의 아들이, 안토니우스의 아들이 이집트와 로마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주인이 될 것이었다. 기원전 31년,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함대를 건조하여 옥타비아누스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의 해군은 안토니우스의 주요 방어지점을 차례로 점령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점차 분열되었고 최후의 일전이 그리스 악티움에서 치러졌다. 이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의 해군은 거의 괴멸되고 만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했고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은 사기를 잃고 패배했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클레오파트라는 해군을 재건하고자 했으나 이듬해 8월,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부대가 이집트에 상륙한다. 소식을 들은 클레오파트라는 차후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 요새처럼 튼튼하게 지어놓은 무덤 안으로 은신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를 칼로 찔렀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클레오파트라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품 안에서 죽음을 맞았다. 동방제국의 꿈도, 이집트의 독립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해로도 모두 수포로 돌아간 지금, 클레오파트라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개선할 때 클레오파트라를 전리품처럼 끌고 다닐 생각이었다.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그런 모욕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을 구걸하는 대신 여왕으로서 마지막 품위를 지킬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마지막 순간, 클레오파트라는 가장 아름다운 옷과 보석 그리고 왕관으로 여왕의 차림을 갖추었다. 그녀의 주변은 꽃으로 가득했다. 충성스러운 시녀가 무화과가 가득 든 바구니에 맹독을 지닌 코브라를 숨겨서 가져왔다. 침대 위에 단정하게 누운 클레오파트라의 몸에 날카로운 코브라의 이가 박혔다. 독이 퍼지기 시작하자 서서히 호흡이 약해지다가 이내 숨이 사라졌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39살이었다. 스스로의 재능과 매력으로 역사를 움직였던, 한 시대를 풍미한 아름다운 여왕의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전해 들은 옥타비아누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카이사르의 유일한 아들이자 적통 후계자로 공표된 카이사리온을 살해한 것이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카이사리온의 존재는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로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조차 실패했던, 영원한 독재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달고 로마 제국 최초의 첫 황제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으로 이집트는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300년의 치세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단순한 요부가 아니라 이집트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한평생을 고심했던 위대한 군주였다. 그녀는 자신의 지혜와 매력을 이용해 혼란에 빠진 왕실을 수습하고, 이집트의 번영을 이끌었다. 로마의 영웅들이 사랑했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그 화려한 삶과 비극적인 최후로 인해 역사 속에서 가장 신비로운 인물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