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친절한 디자인>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고등학교까지, 늘 학기 초만 되면 반복되는 특별한 행사가 하나 있다. 바로 ‘환경미화’란 이름의 교실꾸미기다. 뭐 이름이 좋아 ‘미화’지 사실 그 시절의 ‘환경미화’란? 학생인 우리가 직접 교실을 정비하는(여기서 ‘정비’란 단어를 쓴 이유는 보통 이때의 환경미화는 대청소를 넘어 교실 전체에 페인트칠까지 하는 등의, 꽤나 수고스러운 일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교 본연의 노동을 학생들에게 전가한, 매우 성가신 일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물론 당시의 우리 상황이 그랬고, 그리고 그땐 또 그런 게 나름 우리들의 낭만이기도 했고…. 그리고 여느 해와 같이 그해 중학교 2학년 가을에도 여전히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個性과 美化
환경미화 시즌이 시작되면 대개 이런 패턴으로 일이 진행되곤 한다. 첫 번째, 우선 반장과 부반장 중심으로 환경미화를 어떻게 진행할지 선생님과 상의를 하고, 두 번째, 그 결과에 따라 각종 이름의 학급 간부들이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받고, 세 번째, 그 역할이 또 각 부원들과 개별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그리고 일정에 맞춰 각각의 일들이 진행되고,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맥락과 달리 이때(중학교 2학년)의 환경미화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그 내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때의 상황을…‘지나침’이란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까? 여하튼 그땐 그랬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한 학생이 이야기를 한다. “우리 집에 예쁜 그림이 있는데요!” 그러면 그 학생의 그림이 다음날 교실 벽에 붙게 되는 식이다. 물론 여타의‘환경미화’도 대부분 그런 방식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조금 다른 점… 그것은 그 시절 우리에겐 이렇게 벽에 걸 수 있는 그림의 수, 거기에서 더 나아가 꾸미는 방식에 어떤 형식과 어떤 제약도 없었다는 점이다. 해서 우린 그 시즌에 최대한 많은 그림을 동원해 교실 벽을 채워나갔고, 화분을 비롯해 교실에 가져다 놓을 수 있는 다양한, 모든 것들을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심사(환경미화)일에 다가갈수록 교실은 이른바 도떼기시장처럼, 원래의 취지(미화)를 무색하게 할 만큼, 복잡하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수업에 들어오시는 선생님들마다의 핀잔과 구박도 점점 심해졌다. 하지만 우린 그래도, 무던히 그 일을 행했다. 아니 즐겼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으리라. 담임선생님의 든든한 빽을 업고서 말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필자를 가장 웃음 짓게 하는, 학창시절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때 그 순간이 바로 삭막한 우리의 시절 안에서 유일하게 개성을 표출할 수 있었던, 그런 시간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으리라.
| 개성 | (다음. 우리말 사전)
1. 한 개인이 가지는 고유한 취향이나 특성
2. 각 개체의 특성
이렇게 뜬금없이 옛 추억을 꺼낸 이유는, 길을 지나다 문득 발견한 우리 주변의 간판들, 규격화된 그것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과연 이렇게 규격화된 지금의 간판들은, 광고와 홍보라는 그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 우리 도시의 ‘환경미화’에 진정 걸맞은 모습들일까?
1991년 실질적인 지방자치제 이후, 우리의 도시들은 각각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한, 나름 새롭다는 ‘환경미화’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자본들을, 수시로 동원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시작된 도시꾸미기는 예전 우리의 교실에서 흔히 보았던, 그런 일상의 규격화를 지속적으로 수행해오고 있다. 각각의 브랜드를 표현해야 할, 간판의 역할조차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어폐가 있는 논리인가? 도시의 개성을 위해, 도시의 환경을 위해 오히려 규격을 맞추는, 이런 일련의 시도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의 도시들은 얼마나 차별화가 되어있을까?
규칙은 예술가가 타파해야 할 대상이다.
_ 윌리엄 번벅(William Bernbach)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그 순서에 맞춰 계획이 있고, 또 그 계획에 맞춰 일하고…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도 그것과 같이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우린 늘 동경이란 걸 보내고 있다. 나와는 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개성 있는 인생들에 대해서 말이다. ‘미화’의 사전적 의미는, 아주 단순하게도, ‘아름답게 꾸민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도시, 우리를 둘러싼 간판 역시도, 환경미화를 통해 정말 그렇게 아름다워졌을까? 우리가 늘 동경해왔던, 그런 삶들처럼 말이다.
* 위의 이미지는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서울의 아름다운 간판들이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규격화를 진행하면서, 이건 또 뭐가 아름답다는 것인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라는 도시에 살면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