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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Feb 28. 2018

05. 전국의 며느리들 (마지막 회)

<B급 며느리>



<B급 며느리>는 2017년 4월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2013년 8월, 할아버지 제삿날부터 촬영을 조금씩 시작했고 2016년 후반기에 편집을 마무리했다. 3년 넘게 진행한 프로젝트가 처음으로 관객을 만나기 전, 나는 긴장했다. 제목이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는지 관객들이 꽤 많이 왔다. 상영관 불이 꺼지고 관객들은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나는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관객들을 살폈다.

이때는 모든 영화감독에게 흥분되고 살 떨리는 순간일 것이다. 편집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한 컷 한 컷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가 의도한 스토리와 영화적 장치들을 관객들은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똥 싼 강아지처럼 두리번거리는 동안 영화제 안내 영상이 지나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첫 장면, 김진영이 나왔다.

“명절 때 시댁에 안 갔어요. 그래서 완벽한 명절을 보냈죠.”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서야 나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따라가며 영화의 순간순간을 즐겼다.
  
<B급 며느리>는 전주국제영화제 이후로 전국의 영화제를 돌며 관객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많은 관객들을 만나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영화의 관객은 물론 여성이 많았다. 내가 깜짝 놀란 것은 그들의 격렬한 반응이었다. 영화제에서 영화가 끝나면 GV(Guest Visit,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다. <B급 며느리>의 GV는 피곤할 정도로 길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과 슬픔과 고마움을 표시했다. 특이한 것은 영화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삶과 가족에 대해 말하는 관객이 많았다는 것이다. 마치 미용실에 앉아서 이모들과 수다를 떠는 느낌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의 대화였다. 한 여성 관객이 손을 들었고, 마이크가 건네졌다. 나보다 10살 정도 많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녀는 진영이에게 질문을 하며 자연스럽게 자신이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하던 말을 멈췄다. 울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김진영이 답변을 했다. 그런데 김진영도 하던 말을 멈추고 울먹였다. 객석과 무대에서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다. 나만 빼고.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관객과 진영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 영화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이제 이 영화는 내 것이 아니구나. 이 영화는 관객들의 것이구나.’

나는 감독으로서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구성했다. 하지만 ‘며느리’라는 부조리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이 이 영화를 봤을 때 느끼는 감정의 진폭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국에서 여자, 며느리, 아내,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잔인한 것인 줄은 몰랐다. 마음이 아팠다.

반면에 너무나 유쾌하게 영화를 즐기는 경우도 있었다. 제주여성영화제가 그런 분위기였다. 관객과 깔깔 웃으며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했다. 우드스탁[1969년 뉴욕의 베델 평원에서 열린 대규모 록 페스티벌로, 정식 명칭은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 페어(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다.—편집자 주]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며느리 우드스탁. 그곳에서 김진영은 록스타였다. 그들은 김진영의 말투와 의상, 표정 하나하나에 환호했다. 제주도 사람들은 쾌활한 기질을 가지고 있나 보다.
  
어느 날 서울노인영화제에서 상영 문의가 왔다.

“네? 노인… 영화제요?”

나는 조금 긴장했다. 아니, 많이 긴장했다. 과연, 노인들이, 이 며느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영화 편집 과정에서 친구의 어머니께 모니터링을 부탁드린 적이 있다. 친구 어머니는 “무슨 며느리가 이렇게 말이 많아?” 하고는 10분도 채 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어버이연합에서 우리 집에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망상에 빠진 적도 있다.

나는 GV를 위해 서울노인영화제 상영관에 들어가며 객석을 살폈다. 노인들이 많았다. 노인영화제니까. 그런데 의외로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대화도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할머니들은 진영과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속편 제작을 권했다. 할머니들은 의외로 시어머니보다 며느리인 진영에게 감정 이입을 하며 영화를 감상했다고 한다. 그렇다. 그들도 한때 ‘며느리’였던 것이다. 그들은 며느리로서의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노인이 된 며느리들은 내 손을 꼭 잡으며 감사를 표시했다. 도대체 며느리가 무엇이길래, 반대로 시부모는 무엇이길래 이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주고받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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