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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Feb 28. 2018

02. 평온할 때 위기를 대비하다.

<리더십, 난중일기에 묻다>




조선 조정, 일본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다.

당시 상황을 좀 더 들여다보면, 조선 조정이 전쟁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전에 조선은 왜 나라의 요청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는데, 이때 왜 나라를 다녀온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은 상반된 의견을 내놓는다(통신사 파견에 관련된 내용은 4장의 ‘임진왜란, 그리고 이순신’에 자세히 기술한다). 황윤길은 왜가 반드시 조선을 칠 것이니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럴 그릇으로 보이지 않으며 전쟁을 준비하는 기미가 없었다고 한 것이다. 조선 조정은 의견이 나뉘어 갑론을박하다가 결국 김성일의 의견에 따라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 이후 왜 나라는 조선을 침략할 뜻을 굳히고 조선에 머무는 왜인들을 소환해 왜관이 텅 비자, 조정은 뒤늦게 군 시설을 점검했지만 이미 왜 나라가 조선을 향한 침략의 칼을 뽑아 든 후였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조선 조정은 전쟁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 안일했다. 느낌은 안 좋았지만 왜가 설마 우리나라에 쳐들어오겠냐고 생각한 것이다.


전쟁을 예견하고
준비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임명된다. 부임해 전라 좌수영의 실상을 파악한 그는 실망했다. 병력과 전선, 무기 등이 실제 편제와 다르게 부족하고 낡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당시 병역(군대에 복무하는 것)의 회피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병적부에는 이름이 올라 있으나 실제로 근무하는 병사는 적었다. 장군은 이전의 발포만호(만호는 적의 침입 방어를 위한 만호부의 관리. 발포만호는 전라 좌수영 산하의 군 기지를 책임지는 관리를 말한다) 시절부터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전라 좌수영 내 모든 병력의 징발을 허위 없이 철저히 할 것을 지시했다. 그 덕분에 전라 좌수영은 편제대로 병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난중일기> 임진년 3월 6일 자 기록을 보면 당시 방비 태세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 수 있다.



언제 어느 때든 전쟁을 벌이더라도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장군은 시설과 무기, 전투 장비를 철저히 준비했다. 이런 장군의 노력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육지에는 성을 보수하고 병력을 확보함과 동시에 판옥선 건조를 시작했다. 조정에서 지시한 것이 아니라 장군 스스로 준비한 것이다. 나무를 잘라 배를 만들고, 쇠를 녹여 무기를 만들었다.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미를 확보함과 동시에 소금과 고기를 팔아 병사들에게 군복을 입혔다. 바다에는 여수를 중심으로 전라도 해역의 섬의 위치부터 지형, 인구 등을 조사했고, 물의 흐름과 조수 간만 등의 세심한 부분까지 재조사를 명했다.

또한 장군은 병사들의 해이해진 군기를 바로잡고 단결력을 강화했다. 중앙정부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당파(黨派) 갈등이 병사들에게도 있었다. 공은 모든 병사에게 당파를 짓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서약을 받았고, 이를 일벌백계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전투 집단에게 있어서 단결과 협동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요소임과 동시에 군대의 사기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장군은 내치에도 신경을 썼다.

장군은 무너진 군기를 세우기 위해 군법을 엄격히 적용했다. 임진년 1월 16일의 <난중일기>를 보자.

하급관리뿐 아니라 지휘관들에게도 엄격한 규율을 강조했다. 본영과 각 포진의 지휘관들의 활쏘기 능력을 정기적으로 점검했다. 1월 15일과 3월 15일에 군관들에게 활쏘기 시합을 시켰다는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장군은 활쏘기 능력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 말하면 사격훈련과 훈련점수를 관리한 것이다. 또한 영내의 중요한 의사결정 사항은 5관(순천, 보성, 낙안, 광양, 흥양) 5포(방답, 사도, 녹도, 발포, 여도)의 장수들과 함께 결정하며 그들의 존재감을 일깨워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0여 일 전인 임진년 2월 19일, 장군은 해안의 각 부대를 돌며 점검에 들어갔다. 백야곶을 출발해 여도, 고흥, 녹도, 발포, 방답 등 장군의 지휘 아래에 있는 지역을 돌며 방비 태세를 점검했다. 9일간의 순시를 통해 각 해안부대의 문제와 보완점을 찾아 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이때의 기록이 <난중일기>에 실려 있다.

장군은 적은 병력으로도 적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해저 장애물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좁은 바닷길의 양쪽에 무거운 돌덩이와 나무를 두고 거기에 쇠사슬을 설치했는데, 적선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장군이 바닷속에 쇠사슬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난중일기에 여러 번 등장한다(명량해전 때에도 울돌목에 수중 철쇄가 설치됐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신뢰할 수 없다). 승리를 위해 바닷속까지 살폈던 이순신 장군의 치밀한 준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장군은 일찍부터 전쟁을 대비했다. 갑작스러운 점검과 보수, 훈련과 전투준비에 처음엔 불만을 가진 자들도 있었지만, 잠시였다. 곧 임진왜란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철저한 군비 확충과 지휘관과 군사들의 기강 확립으로 전라 좌수영은 가장 준비된 상태에서 왜군과 싸울 수 있었다. 평소에 위기를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치열한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아주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 만전지계(萬全之計)이다.


당신의 조직,
혹시 낮잠 중인가?

평화롭고 안정적일 때 내부 환경을 잘 정비하고 한마음으로 뭉쳐 미래를 준비한다면 위기 극복은 물론이고 업계 선두의 자리도 굳건히 할 수 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에 투자한 회사가 있는데, 바로 세계적인 기업 인텔(Intel)이다(이 사례는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MBA의 사례 연구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인텔은 창업과 함께 메모리칩을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특히 디램(DRAM : Dynamic Random Access Memory, 컴퓨터의 기억장치 램의 한 종류)의 원천특허를 갖고 시장을 주도했다. 수익도 컸으며 위협하는 경쟁사도 없었다. 하지만 인텔은 CPU(컴퓨터 중앙처리장치)가 회사의 미래를 책임져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방향을 선회한다.

인텔은 CPU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빛나는 결실을 거둔다. IBM과 함께 개인 PC 시장을 열게 된 것이다. 또한 ‘인텔인사이드(Intel Inside)’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세계의 반도체시장을 석권했다. 이제 인텔은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 미래를 향한 시의적절한 준비로 30년간 반도체시장을 주도한 인텔이 앞으로 어떤 변화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인텔은 좋은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사업의 방향을 바꿔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시장변화를 자세히 관찰해 미래 생존전략을 계획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인텔도 사업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일로 인텔 내부는 3년 간이나 진통을 겪었다. 돈 잘 벌고 있는 사업에 주력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투자한다니 내부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당신이 그때 인텔의 직원이라면 어떠했을지를 상상해보면 이해하기가 매우 쉬워질 것이다.

과거의 성취에 도취한 개인 또는 기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설마’를 외치지 말고 현재 잘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나 혹은 우리 회사가 잘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5, 10년 후를 그려보는 것이다. 비교적 또렷하게 모습이 그려지고 그래프로 표현했을 때 점진적인 상향이 충분히 예상된다면 잘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와 반대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면 당장 위기대응 방법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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