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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06. 2018

03. 최후의 승리를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 알다.

<리더십, 난중일기에 묻다>



연합 수군을 위한
이순신의 인내

임진왜란이 일어난 초기의 전세는 조선에 불리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빠르게 북상했다.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하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몽진(피난)을 떠났다. 왜군은 부산 상륙후 보름 만에 한양을 함락시켰고 선조와 대신들은 평양을 거쳐 의주로 향했다. 왜군은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함경도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두려움에 빠진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포기했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조선이 무너지면 왜군이 명까지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참전을 결정했다.

명나라의 참전은 분명히 조선에 도움이 됐다. 조선과 명나라는 연합작전을 펴서 평양성을 탈환했고 이를 기점으로 전세의 흐름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도 컸다. 팔도 각지에서 백성들과 양반, 승려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조직해 왜군과 싸웠다.

모든 일에 명암(明暗)이 있듯이 명나라의 원군이 조선에 도움이 된 것만은 아니었다. 약한 나라 조선을 도우러 왔다는 생각에 명나라 군대와 장수들은 조선을 얕잡아 보았고, 군사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민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희롱하거나 겁탈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1598년 7월 16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예정보다 늦게 전남 고금도 통제영의 이순신 함대와 연합 수군을 형성했다. 정보 수집에 탁월한 장군은 진린과 만나기 전부터 그가 사납고 급한 성격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진린과 접촉했던 조선의 관리들도 그의 그런 성격을 꼬집었다. 조선 후기 학자 윤휴(이순신 장군 사위의 동생)가 지은 <백호전서>에는 진린의 사람됨에 대해 거칠며 교만한 사람이고 자기 부하들의 만행을 보면서도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는 안하무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조선을 얕잡아 보고 대국(大國) 장수라며 교만함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은 <징비록>에 다음과 같은 걱정을 남겼다.

“걱정스럽다.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패하겠구나! 진린과 함께 진중에 있으면 이순신이 견제를 당하고 의견마찰 때문에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기고 군사들은 학대당할 것이다. 이를 제지하면 분란이 일어날 것이요,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일이니 이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육전에서 명군과 조선군과의 갈등을 익히 보아온 류성룡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린이 지휘권을 가졌다고 자신의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곧고 강직한 성품의 이순신 장군과의 갈등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제 막 기사회생한 조선 수군의 운명이 또 다른 암초를 만난 것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장군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의 판옥선의 크기와 함포 공격에 패배를 경험한 왜군은 정유재란 때에는 큰 배인 아다케부네(안택선)를 주력선으로 함대를 구성했고, 규모도 확대했다.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 때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앞서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로 상당수의 배를 잃었기 때문에 명나라 수군과 연합함대를 구성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 있었다. 장군은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린의 성품과 평가가 어떠하든 명나라 수군은 조선을 돕겠다고 온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들과 잘 협력해서 좀 더 효과적으로 전투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아군의 숫자가 많을수록 전투에 유리한 건 사실이니까.

이에 장군은 진린의 수군을 맞아 성대한 잔치를 베풀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식량이나 물자가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진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기 위한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진린은 장군과 조선 수군의 환대에 매우 흡족해했다. 장군은 이후로도 여러 차례 잔치를 베풀며 진린을 극진하게 대우했다.

7월 24일 장군과 진린이 고금도 통제영에서 함께 있을 때 절이도에서 소규모 전투가 일어났다. 녹도만호 송여종이 왜군선 6척을 격파하고 적의 수급 69개를 갖고 와 승전을 보고했다. 8척의 조선 수군보다 많은 30여 척의 배로 절이도해전에 참가한 명의 수군은 아무런 전공이 없었다. 이를 안 진린은 부하장수들을 나무랐다. 이때 장군이 수급 40개를 진린에게 주며 전공을 양보했다.

“명군과 함께 싸운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공을 나누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진린은 기분이 좋아졌고 장군에 대한 신뢰감이 점점 두터워지게 되었다.

이후 여름이 지나고 9월, 두 달여간 함께 지내면서 진린은 장군이 명성에 걸맞은 지략과 용맹함, 철두철미함을 지녔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진린 도독의 신뢰감은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이 협조적인 관계로 발전되는 데 기여했다. 장군의 조카 이분의 <충무공행록>의 기록을 보자.

명나라 수군의 일부가 조선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 일어나자 장군은 의도적으로 명의 수군 주둔지였던 묘당도 주변 백성들의 집을 깨부수며 소란을 피우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린이 장군에게 이유를 물었다.

“조선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상국의 군사들이 조선을 도우러 온다 하여 기뻐하며 반가이 여겼는데, 상국의 병사들이 백성을 괴롭히니 어찌하겠습니까!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려고 합니다.”

장군의 답변에 놀란 진린은 문제를 일으킨 명나라 병사들을 처벌했다. 이후 명 수군의 범법행위에 대해 장군에게 처벌권을 주었다. 상국의 총지휘관으로서 거만하게 굴었던 진린이었지만, 이순신의 사람됨과 장수로서의 능력을 알아본 후 태도가 변화한 것이다.

장군은 현명했다. 그리고 인내했다. 옳지 못함 앞에서는 어떤 불이익을 무릅쓰고라도 꺾이지 않고 바로잡으려 했지만, 더 큰 가치인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인내하고 인내한 것이다.


상호의존성이 있는 곳에는
협력이 필수

나는 모 기업의 직원 채용을 위한 면접위원으로 3년간 참여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신규프로젝트를 지휘할 팀장급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채용공고를 냈다. 팀장급의 경력이 많은 인재를 선발하는 채용이었는데, 100명 가까운 인원이 지원했다.

서류심사를 통해 최종 10명의 대상자를 면접하는 중에 특히 눈에 띈 한 사람의 이력서를 발견하게 됐다. 서울대와 카이스트를 거쳐 MIT에서 학위를 받은 인재였다. 경력 또한 국내 대기업 몇 군데에서 개발팀장을 경험한 이력 때문에 면접위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A 기업에서는 어떤 업무를 하셨습니까?”
“신규 서비스를 위한 플랫폼 개발 업무를 했습니다.”
“이직하게 된 동기는 뭡니까?”
“좀 재미있게 일해보고 싶어서 옮기게 됐습니다.”
“조직 분위기가 어땠는데 그러시죠?”
“팀원들 개인역량은 뛰어난데, 모래알같이 잘 뭉쳐지지 않았습니다. 팀원들이 전반적으로 꽉 막힌 성격들이었거든요.”
“팀장으로서 조직을 관리하기가 힘들었겠군요?”
“예. 일은 열심히 하는데 서로 경쟁하느라 협력이 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면접 후 그의 이력서는 바로 탈락자 이력서가 담긴 파일로 들어가게 되었다. 팀장으로서 조직의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팀장이라면 팀워크를 구축하고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책임에 대한 성찰보다는 구성원들을 탓하는 태도는 리더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탈락하게 된 이유였다.

조직은 개인이 모여 이뤄진 체계적인 집단이다. 조직 안에서 개인 혼자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은 많지 않다. 개인과 개인, 조직과 조직의 연계와 유기적인 조합으로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이 대부분이다. 상호의존적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상호의존성이 있는 곳에는 협력이 필수적이다. 협력을 통해 개인의 힘으로 달성할 수 없는 영역으로 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협력지수가 높은 조직일수록 경쟁력이 높아지고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조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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