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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12. 2018

02.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과 독일농민전쟁

<동화경제사>



그림 형제는 평생을 독일 문화의 ‘원형(原型)’을 탐구하는 데 매달렸다. 특히 그림 동화 제1권이 세상에 나올 때, 독일을 침략한 프랑스 나폴레옹군대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비록 나폴레옹군대의 말발굽에 영토가 무참히 짓밟힌 처지였지만, 독일 민족에게는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이 있으며 머지않아 복수의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임을 그림 형제는 전래동화를 통해 웅변하려 했다. 훗날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민족정기를 드높인다는 명분을 내세워 독일 모든 가정에 그림 형제의 동화집을 한 권씩 의무적으로 비치하도록 명령을 내린 배경이기도 하다.

영국의 삽화가 아서 래컴(Arthur Rackham)의 1909년 작 〈헨젤과 그레텔〉과 독일 화가 알렉 산더 지크(Alexander Zick)가 그린 〈백설공주〉.


하지만 그림 형제가 평생토록 채집한 수많은 전래동화 가운데는 단순히 민족정기로만 환원될 수 없는 또 다른 자양분이 녹아 있는 것도 꽤 많다. 고된 삶의 무게와 그 삶을 이겨내려는 몸부림, 경제적 빈곤과 정치사회적 억압, 그에 맞서는 투쟁과 좌절, 천지개벽에 대한 비원(悲願)……. 날것 그대로인 민초들의 정서 말이다. 주인(인간)에 봉사하던 네 마리 짐승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브레멘 음악대」야말로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독일 역사에 「브레멘 음악대」의 모티브가 되었음 직한 사건이 하나 있다. 16세기 전반기 독일 전역을 비롯해 스위스·오스트리아 일대를 휩쓴 이른바 ‘독일농민전쟁(Der deutsche Bauernkrieg)’이다.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과 독일농민전쟁
  
중세 봉건사회에서 농민은 세속권력(영주·제후·관리)과 종교권력(교황·수도원)을 동시에 먹여 살린 유일한 생산계층이었다. 두 권력을 지탱한 세금과 십일조 수입의 원천은 한결같이 농민의 노동력이었다. 십자군전쟁과 흑사병의 공포가 유럽 대륙을 휩쓴 뒤, 생산계층이 짊어져야 할 부담은 더욱 늘어났다. 경제활동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봉건귀족집단의 해체와 분화가 가속화했고, 급격한 사회변동에 따라 농민계층은 과거에 기댔던 최소한의 공동체 보호막에서조차 내쫓겨야 했다. 억압과 빈곤이 농민의 숙명이었다면, 이제는 여기에 불안정이 덧붙은 셈이다. 엄혹한 세월이었다.

억눌린 농민계층은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을 앞장서 쏟아냈다. 독일농민전쟁 당시 상황을 상상 해 그린 마틴 디스텔리(Martin Disteli)의 판화 작품.


특히 옛 사회질서가 빠르게 허물어지던 15세기 말~16세기 초 독일사회는 화약고 그 자체였다. 변화를 향한 첫 불씨는 세속권력이 아니라 종교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타올랐다. 당시만 해도 가톨릭이 봉건제의 핵심을 이루고, 교회의 교리가 곧 정치적 교리인 세상이었다. 첫 불씨를 지피는 데 앞장선 인물도 농민이 아닌 성직자였다. 그 주인공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 중동부 작센 지역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 조 반박문을 내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란 인물이다. 그러나 루터의 행동을 떠받친 실제 기반은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이었고, 그 주된 에너지는 억눌린 농민계층이 앞장서 쏟아냈다. 성직자였던 루터조차 처음에는 “각종 무기들을 가지고 공격하여 저들의 피로 우리의 손을 씻어선 안 된다는 말인가?”라고 절규했다.
 

마르크스는 독일농민전쟁이 “프랑스혁명 이전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주목할 만한 민중봉기”라 고 말했다. 2013년 열린 독일농민전쟁 기념 행진 모습.


알자스, 작센, 튀링겐, 슈바벤에 이어 스위스와 오스트리아까지. 곳곳에서 억눌리고 가난한 농민들이 들풀처럼 들고일어났다. 훗날 카를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독일 역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에피소드이자, 프랑스혁명 이전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주목할 만한 민중봉기”라 이름 붙였다. 봉기한 농민세력이 내건 급진적 요구를 억누르는 무자비한 진압도 뒤따랐다. 결정적 장면은 1524년 5월 15일 찾아왔다. 독일농민전쟁 기간 중 최대 전투(프랑켄하우젠 전투)가 벌어진 이날,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가 이끄는 농민군은 끝내 패배했다. 진압군에 포로로 잡힌 뮌처는 곧장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날 하루 전투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농민만 6,000명이 넘었다.

옛 동독에서 발행된 5마르크 지폐. 토마스 뮌처의 얼굴이 들어 있다.


루터 지지자였던 뮌처는 튀링겐의 뮐하우젠(Mühlhausen in Türingen) 지역을 기반으로 농노 해방, 수도원 해체, 무주택자 거주지 마련 등 공동소유 확대, 십일조 폐지 등을 외치며 끝까지 농민봉기의 선두에 선 인물이다. 지금부터 약 500년 전에 이미 모든 것은 공동소유여야 하고 개개인에 대한 분배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국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꿈꾼 공산주의 사상의 영원한 원조 격이다. 성직자들이 독점하던 성서를 ‘민중의 언어’로 번역하고 신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외쳤던 루터가 농민봉기의 폭발적인 에너지에 놀라 봉건 제후들과 손잡고 ‘반란’ 진압 쪽으로 확 돌아선 것과 대조적인 행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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