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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사랑한다면, 무엇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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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특징은 온갖 수식어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정말 놀라운 존재입니다. 누구나 뛰어난 독창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를 가득 덮고 있는 발명품들을 보십시오. 독창성과 상상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그 엄청난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인간은 시간을 발명하고 시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저 역시 하루 종일 시계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몇 시가 되면 커피를 마셔야 하고, 몇 시가 되면 강의실로 가야 하고, 또 몇 시가 되면 점심을 먹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12시가 되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점심 식사를 합니다. 12시이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수업을 듣고 있다고 칩시다. 수업에 한창 몰두하는 중이고 재미있는 내용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이 울리면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벌떡 일어나 교실을 빠져나갑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수업이 끝났잖아요? 죄송하지만 이제 나가봐야겠네요.”

교육이 시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9시부터 9시 5분까지는 자유 토론을, 9시 5분부터 9시 30분까지는 독서 토론을, 그다음 9시 30분부터 9시 45분까지는 과학 토론을 합니다. 독서 토론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자, 이제 과학 토론을 시작하자.”

우리는 누군가 정한 법칙과 관행에 따라 받아쓰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서부 개척 시대로 관심을 옮겨야 합니다. 왜 우리가 이런 짓을 반복하고 있는지 이유를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시간의 노예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언어도 만들었습니다. 진정한 언어의 역할은 인간을 해방시키고 우리의 의사소통을 거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인간을 가두는 상자와 봉투가 되고 말았습니다. 버크민스터 풀러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르쳐준 말에 너무 젖어 있었기에, 나는 가족과 친구가 없는 시카고 빈민가로 가서 2년 동안 내 머릿속에 들어 있던 단어들을 모두 지우고 내게 알맞은 말을 찾아냈다. 그런 후에야 나는 비로소 다른 사람의 언어가 아닌 나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미국 저항 문화의 기수였던 티머시 리어리(Timothy Leary)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언어심리학을 연구하던 중에 ‘언어는 현실을 고정시킨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떤 단어의 의미를 정말로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단어의 뜻을 가르칩니다. 그뿐입니까? 언어를 통해 두려움과 편견을 가르칩니다. 언어가 얼마나 현실과 떨어져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옆 사람을 쿡쿡 찌르면서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버스카글리아라는 녀석을 조심해. 리스트에 올라 있는 놈이거든. 공산주의자래.”

그 순간 저는 죽은 목숨이 됩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은 모두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통해 받아들여집니다. 아시아의 어느 대학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공산주의가 무슨 뜻인지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시민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정의가 뭡니까?”

그러자 몇 사람은 기겁을 하며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랍니다. 기회가 되면 그 연구 결과를 한번 읽어보세요. 얼마나 우스운지 모릅니다. 어떤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글쎄요,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워싱턴에서는 공산주의자가 없어졌으면 좋겠네요.”

흑인, 멕시코계 미국인, 기독교도, 가톨릭, 유대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흑인이라는 수식어 하나만 들어도 그 사람에 대해 이미 모든 걸 알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눈물이 있을까? 아프리카 흑인들에게도 감정이라는 게 있을까? 이해를 할까? 희망을 가지고 있을까? 자기 자식을 사랑할까?”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식어의 노예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언어의 주인이 되지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알려준 단어의 뜻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직접 느낀 뒤에 그 단어의 정의를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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