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후반전>
군대에 간 아들이 휴가를 나왔다. 이 아이가 소파에 앉아 있는데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짧게 깎은 아들의 머리카락은 새까맸다. 내 안에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젊었을 때는 나도 분명 저랬을 텐데 지금 나는 흰머리도 많고 머리카락도 부슬부슬 힘이 없다.’ “네 머리는 왜 이렇게 새까마니?” 나는 아들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말을 했고 아들은 나를 그냥 쳐다보았다. 전형적인 중년 아저씨의 말이다.
청소년기에 성호르몬이 분비되면 아이들은 얼굴도 달라지고, 체격과 신체 모양이 완전히 달라진다. 없던 여드름도 생긴다. 아이들은 여드름이 난 얼굴에 스스로 놀란다. 주변에서는 “너, 여드름쟁이 됐구나!”라며 놀리기도 한다. 아이들은 그전의 예쁜 얼굴로 되돌리고 싶어서 여드름을 짜고 또 짠다. 그러면 엄마들은 “그만 짜라. 흉터 생긴다.”라고 잔소리를 한다. 애들 입장에선 자신의 몸에 생긴 변화를 감당하기도 힘든데 주변에서 신체, 외모에 대한 코멘트가 많아지고 제재까지 받으니 짜증이 난다.
이것이 중년기 때도 똑같이 벌어진다. 본인도 본인의 신체 변화에 놀라고 감당이 안 되는데 주변에서 코멘트가 많아진다. 대표적인 것이 흰머리에 관한 언급이다. “흰머리가 많아졌네요. 염색하셔야겠어요.” 등등. 한 번 들을 때는 괜찮지만 두 번 들으면 강조되고 세 번째 들으면 상처가 된다. 나도 왼쪽 머리에 유난히 흰머리가 많아서 이발소에 가면 “염색해드릴까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버티는 중이다. 그나마 흰머리가 한쪽에만 몰려 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농담으로 브리지를 넣었다고 한다.
흰머리뿐 아니라 머리카락이 빠지는 현상도 커다란 변화다. 머리카락이 빠지면 나이가 들어 보여 남자나 여자나 머리숱을 보전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눈가와 입가에는 주름살이 많아진다. 몸매도 배가 나오면서 D자형이 되어간다. 사람마다 익숙하고 좋아하는 몸의 모양이 있는 데 나이가 들수록 그 모양이 점점 사라져 가면서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원하는 대로 변화가 일어나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원하는 것은 점점 멋있어지는 것인데 현실은 점점 볼품없어지는 쪽으로 간다. 흰머리, 대머리, 주름, D자형 몸매……. 흰머리? 나는 원하지 않았다. 나는 흰머리 없이 까만 머리로 살고 싶다. 그래서 염색을 하게 된다. 사실 염색은 속임(fake)이다. 진짜를 가리는 가짜다. 원치 않는 변화가 생길 때 변화를 따라가는 쪽이 아니고 변화를 거스르는 쪽으로 가면 사람에겐 언제나 페이크의 주제가 생긴다. 페이크 주제는 중년 여성들에게 더 많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신체적 변화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중년 남성들이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느끼며 시간을 신경 쓰기 시작하는데 이는 죽음과 연관이 있다. 이것도 내가 원하지 않는 자연 현상이다. 죽음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연의 스케줄에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다가온다. 인간은 유기체이고 모든 유기체는 변화하는 생명체다. 그러니 안티에이징은 유기체의 삶에 반하는 행동이다. 모든 생명체들 중에 유일하게 인간만이 유기체의 경향을 거스른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기도 하다. 중년기에 원하는 것과 반대로 가는 이 변화를 어떻게 핸들링하느냐에 따라 위기로 가느냐 또는 성숙으로 가느냐가 결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