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괜찮아>
‘그대로’를 사랑한다는 것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소극적으로 말하면 상대의 ‘이런 게 싫어서’, ‘저런 게 마음에 안 들어서’라는 이유로 상대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자는 자신과 이질적인 존재이므로 때로는 위화감이 느껴지거나 거슬리는 부분이 있을 수 있죠. 그렇다고 해서 그 상대의 존재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것이, 상대의 모든 점을 좋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상대에게 뭔가 위화감이나 불만을 느끼더라도 상대가 여기서 살아가며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가능하다면 사랑하는 것이지요.
부모자식 관계를 예로 들어 보면, 내 아이가 반드시 부모인 내 기대에 부응하는 반응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아이라 할지라도 결국 나와는 이질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타자’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제 아이로부터 이질감이나 위화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아이의 존재 자체를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은 제가 타자인 내 아이의 이질성을 제 안으로 친근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노력 없이 상대를 그대로 수용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상대를 그대로 수용하는 일이 상대의 모든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를 그대로 ‘좋게’ 평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상대의 존재를 거부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그대로를 사랑해 주었으면 한다’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건 무리한 이야기죠. ‘자신을 그대로 사랑해 주기 바란다’는 것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생각해 주길 바라는 것이라면 그 또한 무리입니다.
‘그대로’의 두 가지 의미
‘그대로’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됩니다. ‘모든 것’이라는 의미와 ‘존재 그 자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 특성과 능력을 갖추고 살아가지요. 그런 맥락에서 ‘그대로’는 부분적인 특성이나 능력의 모든 것이라는 의미와 그 부분적인 특성과 능력을 갖추고 살아가는 이 사람의 존재 그 자체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의 ‘그대로’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니까요. 적어도 제게는 무리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라는 의미지요. 이런저런 부분에 구애됨이 없이 그 사람이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최소한 거부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것, 가능하다면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의 마음이라 할까요.
상대의 이질성을 수용하는 형태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가능하면 친밀한 ‘좋은 관계’로 만드는 것. 그것이 동양, 조금 폭을 좁혀 보면 우리의 ‘상호협조적 자기관’에서 볼 수 있는 자기의 존재 양태 아닐까 합니다. 이것이 상대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의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대로를 수용한다는 일이 상대와의 이질성을 없애고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면, 어려운 일이겠죠. 다소 싫은 부분이나 위화감을 느끼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너그러이 봐주는 것입니다. 은둔형 외톨이 아들을 둔 어느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면 ‘스트라이크존’을 넓히는 거죠.
이는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자신을 거부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그런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는 자신을 인정하며 긍정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대로를 긍정한다는 것이 모든 것을 ‘좋다’고 긍정하는 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좀 더 눈이 컸더라면’, ‘좀 더 성격이 유들유들했더라면’, ‘좀 더 머리가 좋았다면’ 등 자신에 대해 여러 가지 아쉬운 점이 있더라도 ‘뭐, 됐다’면서 너그럽게 봐주는 겁니다. 이게 나라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삶을 수용하는 겁니다. 이렇듯 ‘상관없다’, ‘괜찮다’는 ‘인정’의 의미로 긍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그 나름의 그릇의 크기와 마음의 넓이가 필요합니다. ‘스트라이크존의 크기’ 말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하나하나 신경 쓰고 푸념하고 불평하며 감정을 상하거나 상처받지 않는 마음의 넓이가 그것입니다. 주관적인 자신의 기분과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평정심이죠. 그런 담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어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타자’나 ‘자신’에 대한 주관적인 기분과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쉽게 표출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짜증난다’, ‘귀찮아’, ‘열 받아’, ‘죽어라’, ‘꺼져’… 마치 재채기를 해 세균을 흩뿌리듯 세상에 감정과 상념이 소용돌이치고 있어요. 감정과 상념이 동요하지 않는 평정심은 실종된 상태입니다. 어른스러운 분위기의 세상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성숙한 어른의 세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계가 인간을 점점 ‘꼬마’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즈음에서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이미 부모를 잃은 제가 부모로서 부모들을 향해, 그들의 시선으로 글을 썼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상대나 타자를 ‘부모’로 바꾸면, 아이들의 입장에 거의 그대로 적용됩니다. ‘내가 이 부모를 선택해 태어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부모를 상대해야만 하는 거지? 농담하나!’라고 말하고 싶은 아이들이 잔뜩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모 이상으로 심각한 것은 아이들 쪽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버려지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부모와 자식을 비교하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될 때까지는 부모 쪽이 압도적인 ‘강자’의 입장이죠.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이질성, 위화감 등을 참아가며 이질성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 속에 간신히 부모들을 수용합니다. 부모들도 이 점을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과 부모 모두를 대상으로 상담해 왔던 제가 경각심을 담아 충고합니다.